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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때부터 정부가 다 해주는 ‘톱다운 방식’ 고착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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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호 06면

한국식 구조조정의 문제점

1997년 11월 외환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한국식 구조조정’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시장 규율을 따르는 자기 주도적 구조조정이 아닌 정부가 칼을 뽑아야 시작되는 ‘톱다운’ 방식이다. 초기 대우그룹 해체 과정에서부터 금융기관 정리, 구조적 불황에 빠진 기간산업 구조조정까지 정부가 총대를 메야 굴러간다는 믿음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시작해 결말을 보지 못한 조선·해운업 구조조정도 그렇다. 97년 이후 산업지도를 재편하는 또 한 번의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새 산업 지형에서 정부가 예측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있는 역할도 한계에 달했는데도 자꾸 정부의 개입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시장 규율에 따른 구조조정 안 해 #공적자금 투입만 눈덩이처럼 늘어 #하이닉스 반도체 호황 맞물려 회생 #조선업은 과잉설비로 수렁에 빠져 #채권단·노·사 모두 만족하기 어려워 #안정화 되는 쌍용차 정도면 선방

이 정도로 운 좋은 경우는 드물다

“10년 설움 떨쳐내고 부잣집에 시집가다.” 2011년 ‘애물단지’ 하이닉스가 SK텔레콤에 매각되자 나온 평가다. 99년 LG반도체가 정부의 대기업 빅딜 정책에 따라 현대그룹으로 넘어가 현대전자와 합쳐져 세계 2위 반도체 회사가 됐다. 하지만 2000년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채권단 공동관리를 받아 왔다. 채권단을 이끈 외환은행이 하이닉스 때문에 휘청거릴 정도였다.

 채권단 공동관리를 4년 만에 졸업하고 회복세를 보였지만 주인 찾기는 쉽지 않았다. 2009년 효성이 인수를 시도했다 철회한 뒤 3년 만에, 공동관리 개시 결정 10년 만에 새 주인을 찾았다. 시가총액 12조원이었던 SK하이닉스는 현재 시가총액 55조원짜리 기업이 됐다. 여기에 지난해 일본 도시바까지 품었으니 구조조정 중 기업이라면 누구나 꿈꿀 만한 해피엔딩이다. 그러나 현재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제2의 SK하이닉스’를 목표로 하기엔 걸림돌이 많다. 우선 이 성공 스토리는 재무적 정상화와 반도체 호황과 맞물려 생겨난 결과이기 때문이다. 감원과 허리띠 졸라매기 등 하이닉스 직원들이 10년 동안 감수한 희생도 작지 않았다. 그래도 반도체는 어려운 상황하에서도 물건을 만들면 누군가는 사갔다. 주문이 끊긴 조선업이나 자동차와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독이 된 ‘단군 이래 최대 호황’

2000년대 중반 시작된 조선업 ‘수퍼 사이클’은 다이어트의 기회를 놓치게 한 진통제였다. 당시 중국 경기 호황으로 발주량이 폭증해 국내 조선 3사는 최대 호황을 누렸다. 조선업체의 과잉설비에 대한 경고는 2010년부터 나왔지만, 업계의 대응은 한 발 늦었다. 중국 조선사가 무섭게 추격하자 한국 조선 3사는 해양플랜트 수주에 뛰어들며 덩치를 유지하기 위한 일감 확보에 나섰다. 해양플랜트 사업 경험이 없었지만 ‘조선 강국의 미래 먹거리’로 너도나도 주목했다. 결국 해양플랜트에서의 손실은 대우조선해양을 수렁에 밀어 넣었다. 유가 하락으로 해양플랜트 계획은 중단되고 기름을 실어 나르는 데 필요한 유조선 수주도 중단됐다. 위기의 대우조선을 살리기 위해 들어간 공적자금은 7조원, 향후 예상 지출액을 더하면 14조원으로 추산된다. 기업은 기업대로 팔 수 있는 자산은 다 처분하고 재무건전성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지만 정상화는 기약이 없다. 전문가들이 “공적자금을 거제 지역 실업 대책이나 대안 산업 발전에 썼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다. 세계경기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지만 이 기간 감수해야 할 비용도 만만치 않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쌍용자동차는 자동차 업계는 물론 한국 사회에서 아픈 손가락이다. 2009년 경영난으로 법정관리를 신청해 정리해고를 진행했고 직장폐쇄에 장기 불법 점거 파업까지 상처가 많다. 청산을 가까스로 면하고 법원에서 회생 계획안이 통과돼 기회를 잡았다. 얼핏 실패에 가까워 보이지만, 구조조정 전문가들은 쌍용차를 ‘한국에서 드문 성공 사례’로 꼽는다. 쌍용차를 사들인 상하이자동차가 고의 부도를 내고 노사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어쨌든 정부 개입 없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2011년 인도의 자동차 회사인 마힌드라가 인수한 뒤에는 안정화되고 있다는 평가다. 지금도 실적은 나쁘다고 평가해야 맞다. 하지만 마힌드라와 공동으로 미국 공장을 설립해 미래를 모색하고 있으며 티볼리와 렉스턴이 판매 호조를 보이는 것이 희망적인 부분이다. 채권단이나 경영진 혹은 노조 중 누군가는 아름답지 않은 구조조정 과정을 인정해야 치료를 향한 결단을 내릴 수 있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 연구위원은 “한국은 성공한 구조조정에 대한 목표치가 지나치게 높다”며 “기업이 호실적을 거두며 업계 선두 자리를 탈환하고 일자리를 모두 지키는 식의 결과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것이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구조조정의 목표가 애초에 병든 기업을 치료하는 과정인데 매번 기적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이다.

전영선 기자 azu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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