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판 '유전무죄' 재판 다시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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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판 '유전무죄' 논란을 일으켰던 현지 유력 재벌가 자제의 여성 패션모델 살인 사건의 재판이 원점에서 다시 이뤄지게 됐다. <본지 3월 16일자 10면>

뉴델리 고등법원은 1심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석방된 설탕 재벌가의 아들인 마누 샤르마(31) 등 9명의 피의자를 재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현지 언론이 23일 보도했다.

고등법원 재판부는 피의자 전원을 출국 금지하고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한편 다음달 18일까지 1심 법정에 재출석할 것을 지시했다. 특히 조서를 사후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는 경찰관도 별도로 조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도 경찰은 이날 고등법원의 명령에 따라 100여 명에 이르는 증인을 재조사하기로 했다. 앞서 지난달 9명의 피의자는 1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1심 재판부는 "경찰 조서가 형편 없고 검찰도 혐의를 입증하지 못 했다"고 석방 이유를 밝혔다. 사건 직후 범인의 인상착의를 상세히 증언했던 목격자 대부분이 막상 재판정에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며 애초 진술을 번복한 것이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이들이 풀려나자 대도시 중산층을 중심으로 인도 곳곳에서 판결 불복종 운동이 일어났다. 뉴델리 시민들은 "부자들이 돈으로 증인들을 구워 삶았다"고 주장하며 거리 촛불 시위를 벌였다. 숨진 제시카의 자매인 사브리나와 발사가 참석하면서 집회는 점점 규모가 커졌다. NDTV 방송에서는 피의자들을 다시 법정에 세울 것을 탄원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국민의 분노가 높아지자 만모한 싱 총리도 "사법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법 개정이 필요한지 검토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고법의 이번 결정에 대해 제시카의 유가족들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피의자들이 해외로 도주할 걱정도 덜게 돼 다행"이라고 답했다.

강병철 기자

◆ 인도판 '유전무죄'사건=인도 부유층 자제 9명이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가 1심에서 무죄로 풀려난 사건이다. 이들은 1999년 뉴델리의 사교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패션모델 겸 TV 진행자인 제시카 랄(당시 34세)이 술시중을 거절했다고 총으로 살해하거나 이를 방조한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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