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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과 5·18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2백명 가까운 사망자와 수많은 부상자를 낸 광주사태가 만8년이 된 지금껏 해결을 못보고 있는 것은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는 사회로서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집권세력의 소극적 태도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광주사태는 민주화를 위한 항쟁이라는 점에서 4·19와 맥을 같이한다. 다만 공간적 범위의 전국성과 국지성, 결과로서의 정치세력 변동여부 및 저항대상의 성격에서 4·19와 차이가 있다.
그러나 광주사태는 비록 단기간이긴 하지만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정지된 상태에서 현지주민의 자율과 자치에 의해 내부질서가 유지됐다는 점에서 시민공동체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근로자, 지식인등 사회의 각계각층이 참여했던 것은 주로 학생들만 참여한 4·19나 부마사태와 성격을 달리한다.
당시 정부는 광주사태를『불순분자의 조종을 받는 난동분자들의 내란』이라 규정하고 관련자들을「폭도」라고 호칭, 범법자로 처리했었다.
8년이 지난 지금 제6공화정은『나라의 정치발전이라는 큰 흐름에서 볼 때 광주 학생과 시민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그 성격을 재 규정했다.
우리 헌법은 전문에서 「4·19민주 이념의 계승」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국민 저항권의 정당화로 해석된다. 이런 점에서 광주사태 정당화의 합헌적 근거는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5·18광주사태는 하루전의 5·17사건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5·18사건은 또 12·12사건과 분리될 수 없다.
12·12나 5·18은 당사자들의 의사나 그 정당성의 여하에 관계없이 국민이 참여하지 않았고 집권층 내부의 권력 변동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논리상 군사집권이다. 이것은 법학의 「헌법 변동론」이나 정치학의「권력 변동론」으로도 분명하다. 4·19가 이승만 정권에 의해 빼앗긴 국민주권의 회복을 위한 저항이라면 광주사태는 5·16이래 군사정권에 의해 다시 빼앗긴 주권을 회복하고 정치의 재 군사화를 막으려는 운동이었다. 80년5월 전국을 휩쓸었던 학생시위는 10·26후 기대했던 국민주권의 회복이 불투명해지자 일어난 항거다.
당시 서울에서는 학생 데모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있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이른바「서울역의 회귀」가 있은 후 운동권 세력이 시위를 멈추고 다시 준비논 노선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광주에서는 종전의 투쟁논으로 일관하다가 확대된 계엄령 하에서 계엄군과 충돌하여 유혈이 일어났다.
제5공화정은 광주사태를 해결치 못해 줄곧 비 정통성과 비민주성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렇게 큰 사건을 두고도 정부 쪽에서는 누구하나 책임진 사람이 없었다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공직자의 책임이란 직접적인 관련여부를 떠나 결과에 대한 지휘 책임까지 포함된다는 원칙을 외면한 처사다. 4·19때 집권층이 물리적 힘으로는 저항세력을 진압할 수 있었으나 사후수습 과정에서 책임을 지고 정부가 퇴진한 것과는 좋은 대조가 된다.
이제 광주사태는 조속히 매듭지어야 한다. 엄정한 조사와 거기에 입각한 평가와 처리가 있어야 한다. 처리 내용에선 광주시민의 의사가 반영되고 국민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광주사태는 역사적 사건이란 차원에서 접근하되 이것이 피해자의 상처를 건드리거나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정치에 이용되는 매개물이 돼서는 안 된다. 지금은 광주사태를 조속히 해결하고 그 교훈을 살려 다시는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희생자의 영령을 위로하는 가장 값진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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