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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JP"「낌새」알면서도 손 못썼다"|"정풍운동은 암시 받고 움직인 꼴"|정일권씨 체포팀 무전연락 받고 그냥 철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서울에서의 대규모 대학생 연합시위등 전국 주요도시가 가두데모로 혼란이 극에 달하던 80년 5월15일 항간에는 군출동설이 파다했다.
효창운동장에, 여의도에, 중낭교에 군부대가 집결중이라는 등의 제보전화가 신문사에 빗발쳤다.
위기감은 정가는 물론 사회 구석구석에 감돌았지만 학생 데모가 일시 중지된 가운데 16일이 가까스로 넘어갔다.
불과 며칠전 방문한 「글라이스틴」주한미대사로부터 조심스런 경계의 말과 함께, 그러나 군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해오던 김대중·김영삼씨도 중동을 순방중인 최규하 대통령의 급거 귀국과 심야 시국대책회의·군지휘관회의등을 지켜보면서 목전으로 다가온 위험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일찍부터 파국을 예견했다는 김종필 공화당총재를 포함, 이른바 「서울의 봄」을 이끌어 오던 세 김씨는 각기 자택에서 참모회의를 소집, 사태를 숙의했으나 묘책이 있을리 없었다.
17일 저녁 아직도 늦봄의 햇살이 서녘에 드리우고 있을 즈음 세 김씨의 집에는 계엄군이 이화여대에서 시위 방향을 논의하던 전국 55개대학 학생대표 95명을 덮쳤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드디어 계엄군이 행동을 개시했음을 알리는 첫 소식이었다.
모두들 우려하던 게 현실로 나타났음을 확실히 깨달았다.
곧 이어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는 연락이 왔고 군인들이 곧 들이닥칠 것 같으니 피하는 게 좋겠다는 전화도 빗발쳤다.
세 김씨의 집 주위에는 계엄당국이 보낸 요원들이 한층 긴장된 얼굴로 감시의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다.
김영삼씨 자택에 모였던 신민당간부들, 김대중씨 자택에 왔던 재야인사들이 속속 자리를 떴고 측근 비서들만이 남았다. 김종필씨의 자택에는 그래도 『돌아가보라』는 김씨의 권유에도 불구, 5∼6명의 공화당 간부들이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숨막히는 긴장이 전 서울 시가지를 뒤덮고 있는 가운데 보안사 사복 요원을 태운 검은색 승용차들과 수경사 전투병력을 실은 트럭·버스들이 제각기 명령받은 지점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5명 안팎으로 구성된 사복요원팀은 구여권 및 재야인사들의 체포를 담당했고 총검으로 완전 무장한 계엄군엔 김대중씨의 검거 연행과 혹시 모를 저항 분쇄 및 동교동자택의 외부차단 임무가 주어졌다.
검거 대상자의 소재는 이미 파견된 감시요원들에 의해 파악돼 있어 거의 예정대로 연행됐으나 소요 선동, 배후조종 혐의로 지목된 일부 재야인사와 운동권학생등은 미리 낌새를 채고 자취를 감추었다.
김대중씨와 김종필씨는 각오한 듯 결연히 연행 요원을 맞았다. 김영삼씨는 한복까지 갈아입고 있었으나 병력은 상도동자택 주위에 배치만 됐을 뿐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김종필씨의 경호관이었던 최인관경위 (현 비서관) 는 당시 상황을 이같이 말한다.
『17일 밤11시15분쯤 미니 버스 2대에 M-16소총을 든 병력이 집앞에 도착, 집주위를 포위했습니다. 이어 합수단 사복요원 3명을 태운 검은색 브리사 한대가 도착했고요.
집을 포위하는 순간 아차 싶어 권총을 꺼내들었습니다. 그때 보안사S분실의 장모준위가 인솔하는 수사관들이 다가와 총재께서 계시느냐며 「세상이 시끄러워 잠시 모시고 가 상의할게 있다. 만나게 해달라」고 하더군요. 비상국무회의 소식도 30여분전 듣고해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대문을 열어주자 그들은 즉시 제 권총을 뺏고 다른 사람들도 무장 해제시켰습니다.
세사람은 총재께서 계신 방으로 가 「시끄러워 저희들이 모시겠다」며 브리사 승용차에 태운 다음 곧바로 연행했습니다. 20분 뒤에 다시 사복요원 4명이 들이닥쳐 집안을 일제 수색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는 총재님의 일제 슈퍼살롱 승용차와 수행차인 로얄 승용차도 가져갔고요.』
JP는 수사관들이 방을 들어서자 담담한 어조로 『왔구먼. 갑시다』며 일어섰다.
이때 부인 박영옥여사가 울먹이며 『이게 뭐요』라고 외치자 JP는 『나올 거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돌아오겠지』라고 달랬다.
집에 함께 있던 장영정 공화당부의장에게 『장선배, 뒤를 부탁합니다』(장부의장은 JP의 공주고 3년선배로 JP는 그를 항상 깍듯이 대했다) 는 말을 남기고 수사관들을 따라나섰다.
JP의 부인 박여사는 가택 수색을 실시하자 『다 뒤지세요. 이런 일이 어디 한두번이었나』하면서 체념 속에서도 당당했다고 한다 (JP는 그 자신이 정치적 우여곡절을 겪을 때마다 이같은 변고를 겪어야했고 그런 수난은 이미 대여섯차례가 됐다는 것. 특히 JP와 반목이 심했던 김형욱 정보부장때는 외부와의 연락을 막기 위해 전화기까지 떼냈고 집안에 요원을 상주시키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박종규 경호실장이 직접 나와 상주 요원들에게 「너희들 부장한테 얘기할테니 가보라」고 쫓기도 했고, 김형욱 부장한테는 「그런 짓은 말라」고 다투기도 했었다).
다른 한 관계자는 『요원들이 정일권씨를 체포하기 위해 정씨의 한남동 자택에까지 왔었으나 긴급 무전연락을 받고 철수했었다』며 박종규 전경호실장은 전두환 장군과 전화 연락을 시도, 통화까지 했으나 결국 연행됐다고 밝혔다.
JP 본인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신」공화당 총재로 8년만에 재기한 김종필씨는 총선 직후 기자와 만나 80년 5월17일의 순간과 연행뒤의 조사과정 및 재산 「양도」과정 등에 관해 소상히 털어놓았다. 김총재는 또 10·26이후 군의 등장배경, 역부족의 민주화운동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인고의 세월이었죠. 수모를 당하고 엎드려 있어야 했습니다. 대통령선거가 일어날 계기가 됐지요. 물론 국민들이 가만히 있으라면 안나왔을겁니다』고 말문을 연 김씨는 『국민이 두들겨서 그렇게 됐다면 아무 말 않겠으나 「국민」이 아니면서 우리의 근대화노력, 민주화 작업을 가로막았어요』라고 신군부, 즉 민정당정부를 비난한다.
『일찍부터 이런 사태를 예견했습니다. 야권에서는 「봄」이 온 것처럼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당시 춘내부사춘이란 말을 한것도 이런 것을 예상해 했던 겁니다. 80년 2월25일 인촌기념관에서 김영삼·김대중씨를 만났을 때 「엉뚱한 힘에 의해 다 결딴난다」고 경고했습니다만 흘려듣더군요. 나는 군부의「준동」(김씨는 이런 표현을 썼다)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당할 줄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어요. 힘이 없었으니….』
그는 「알면서도 당한」사연과 관련,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당시 공화당은 여당이 아닌 한갓 다수당에 불과했습니다. 야당도 아니고 어정쩡했다고나 할까요. 어쨌든 80년 당시 나는 전두환·노태우장군등 군부 지도자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그 동안 고박정희대통령은 특히 내가 군관계자를 만나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었고 나도 박대통령에게 부담주는 것이 싫어 의식적으로 군과의 접촉을 피했습니다 (박대통령은 후계자로 거명되던 김총재가 군부와 연결되는 것을 경계했고 결과적으로 김총재는 군을 「알면서도」군내부에 지지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10·26을 맞았다. 더우기 신군부의 리더들과 육사17기를 중심으로 한 개혁론자들은 김총재를 「때묻은」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었기에 그의 입지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육사 동기생들조차 잘 안만났으니까요.』
자신도 불과 3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혁명을 해봤기에 「무력」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김총재는 말을 이어갔다.
『그들이 12·12사태로 자신감을 얻은 이상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유정회의원까지 지내고 모신문사 간부로 있던 이모씨등 구정권 아래서 많은 혜택을 본 사람들이 다들 그쪽으로 붙었지 않습니까.』(힘의 소재가 일단 확인되면 모든게 한쪽으로 쏠림으로써 다른 여지가 없다는 설명이다).
김총재는 「위컴」주한미군사령관도 군부의 이런 의도를 뻔히 알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노라고 밝히면서 박찬종·오유방·남재지·정동성·유경현·이태섭·홍성자의원등 공화당내 소장의원 17명이 제기한 정풍운동도 저쪽(신군부)과 연결되어 움직인 것이라고 비난했다.
김총재는 『정풍파의원들이 전당대회를 열어 당개편등을 하자기에 「깜깜해서 안보이니 기다리자. 지금은 때가 아니다. 가을이나 오면 어쩔지 모르겠다」고 말렸었다』고 술회하면서 최규하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도 『당했다』고 했다. 그는 이날 기자와의 대담에서 『당했다』는 표현을 자주 써 구여권 지도자로서 「후배」들에 대한 유감을 표하기도 했는데 『당하는 것은 알았지만 어디까지 당하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5·17 계엄 확대 3개월전인 80년 2월 전국을 순회하던 중 수원에서 『예상할 수 없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고 발언했다가 당시에는 『당원들에게 용기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한 것이다. 내년 선거에 지면 어려운 처지에 직면할 것이라는 뜻이다』고 해명하면서 『정치권외의 바람은 기우』라고 했던 김총재는 그가 예언한 「중대한 사태」에 따라 신군부의 명령을 받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된 것이다. 5월17일밤 11시30분이었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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