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정치에 휘둘린 국민세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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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공항은 원래는 군 비행장이었다. 1989년 민간 항공사가 운항을 시작했다. 변변한 교통수단이 없는 오지여서 항공수요가 의외로 높았다. 97년에는 승객이 연간 39만 명까지 늘어났다. 공항 수용능력이 36만 명 정도였으니 포화상태였다. 하지만 춘천~대구를 잇는 중앙고속도로가 2001년 개통되면 항공기 승객이 줄어들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실제로 일부 구간이 개통되면서 승객이 이미 줄고 있었다. 게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도 건설 중이었다.

그런데 1999년 10월 경북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은 "예천공항을 확장하겠다"고 공약했다. 2000년 치러질 16대 총선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그해 12월 한겨울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건설공사가 시작됐다.

예천공항만 그런 게 아니다. 전남 무안공항과 경북 울진공항은 사실상 공사가 마무리됐지만 승객이 없을까 봐 개항을 자꾸 늦추고 있다. <본지 3월 22일자 1면>

다 지어놓고 놀리는 두 공항의 유지.보수에만 한 해에 수십억원의 세금이 쏟아부어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개항을 해봐야 승객이 없어 여전히 돈을 퍼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공항의 개항이 자꾸 연기되는 데는 정치적 고려도 깔려 있는 듯하다. '어차피 욕먹을 게 뻔한데 우리가 정권을 잡은 동안에는 (혹은 내가 장관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모른 척 넘어가자'는 심리다. 전국 항만.공항.지하철.다리 등 수많은 대형 국책사업에서 이런 식으로 낭비되고 있는 국민세금이 얼마인지는 가늠도 안 된다. 또 방만한 공기업 운영으로 인한 천문학적 낭비는 한두 번 지적된 게 아니다.

노무현 정부는 입만 열면 "양극화 해소"를 외친다. 분명한 건 이런 낭비만 제대로 감사해도 막대한 재원이 절약된다는 것이다. 엉터리로 판명된 대형 국책사업의 뒤에는 항상 거물 정치인들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런 사업치고 망가지지 않은 게 드물다.

정치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 논리에만 매달리게 되면 국가 경제는 곤두박질치는 것도 사실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의 선심성 공약을 국민과 언론이 눈 부릅뜨고 감시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강갑생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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