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종아리 걷고 회초리 맞을 각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여소 야대의 국회를 바라다보는 행정부의 입장은 종아리를 걷고 회초리를 기다리는 형국이다.
국회를「행정부의 시녀」정도로 간주하던 시대는 가고 이젠 국회에서 야당의 협조 없이는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다.
정부가 가장 곤혹스러워 하는 것은 야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삼아 일해본 경험이 전혀없어 야당의 눈치를 어떻게 살펴야 하느냐는 점이다.
우선 야당은 국정 조사권과 감사권을 갖고 행정부의 모든 업무를 감시·견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3야당이 힘을 합치면 모든 현행 법률을 개폐시키고 정부입법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당장 농가부채 탕감·면세점 인상 등 선거과정에서 내건 야당의 공약사항이 입법화될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정부의 대응 수단은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 행사밖에 없다. 국회를 통과한 법률을 대통령이 거부하면 국회는 다시 심의해 재적 3분의2 찬성을 얻어야 하는데 3야당이 합쳐도 3분의2는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사건건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야당의 입법을 저지하려면 반드시 1개 야당을 여당 편으로 끌어들여 과반수를 확보해야할 판이다.
여차하면 여당만으로 변칙 처리해 왔던 예산안 및 각종 세법 통과가 ,법정시한을 넘기면 가 예산을 집행해야 할지 모르고 그렇게 되면 정부가 계획했던 각종 국가사업의 효율적 추진은 차질이 불가피해진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 정부의 어려움은 한층 더해질 것이 틀림없다. 여당 의원이 아예 없거나 극소수인 호남과 부산·충남지역의 지방행정은 자칫 야당의 주문대로 움직여 정부의 예산권과 행정권이 무력해질 가능성이 있으며 경찰 등 지방공무원 인사 및 지방사업과 지방예산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야당의 입김을 어떻게 줄이느냐가 큰 걱정거리다.
이토록 여건은 어려운데 현 내각은 여약 야강의 정치구도에 맞춰 구성돼 있지 않아 대응 능력을 알 수 없다. 안기부장·내무장관 경질이 내각 외 정치력 강화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하나 그 정도로는 미흡하다는 것이 정부내의 일반적 시각이다.
때문에 야당 몫으로 돌아갈 상임위 소관부처 장관은 민정당 의원 중에서 발탁해야할 것이란 얘기가 정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어쨌든 정부는 13대 국회가 개원되면 종전의 정부·여당 위주의 당정 협의방식에서 탈피, 여야가 모두 참여하는 형태의 사전 정책협의 체제를 구축하는 등 새로운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다.
정부는 여야의원들이 고루 배치되는 국회 상임위원회를 당정 협의의 중요한 채널로 활용, 정례적 또는 수시로 간담회를 갖고 국정의 깊숙한 부분까지 브리핑하는 한편 의견을 청취할 계획이다.
또 주요 현안에 대해선 국무총리가 직접 나서 야당을 상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순수 정치문제는 청와대나 민정당 쪽에서 해결해 나가더라도 행정관련 현안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처하겠다는 각오를 하고있다.
지금까지 주요 문제에 대해 비공개 외주로 추진하던 행정 스타일을 공개체제로 바꿔 각종법안의 제정이나 개폐, 정책수립 때에는 입안 단계에서부터 여야 각 당은 물론 사회 각계각층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할 계획이다. 각 부처별로 기자 브리핑제도 활성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안보·외교부문에 대해서도 과거보다 훨씬 더 유연한 자세를 취해 야당에도 국무차원의 협력을 진심으로 요청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러나 아무리 정부가 노력해도 국민 여론과 야당 주도의 국회 사이에서 행정부의 위상이 불안해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행정부의 대야설득이 저자세나 회유책으로 기울 때 자칫 정치분위기가 혼탁해질 우려도 없지 않다. 야당이 위원장을 맡을 상임위는 대화나 설득보다 오히려 더욱 혼탁해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정부 관계자들은 보고있다.
그러나 정부내에는 차츰 국회와의 갈등 문제가 민주화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언젠가는 극복되어야할 진통이라는 인식이 넓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부에서는 야당이 주도하는 국회가 정부에 불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예컨대 대미 통상외교 등 외교관계에서는 강력한 야당 출현으로 오히려 정부의 입장이 강화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관측이다.<이규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