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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강 80년서울의여름(7)5·16혁명사가 교과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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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로권력을 장악한 신군부세력은 국보위를 만들고 개혁·척결작업을 통해「권력뿌리내리기」작업을 시작한다.
더이상 배후조종자가 아닌 명실상부한 권력주체가 되기위해서는 다른 누가 없지않느냐는 당위성을 구축해 나가는게 시급했던 것이다.
5월31일의 발족에 이어 6월5일 그 핵심체인 상임위원을 임명한 국보위는 13개 분과위원회의 하나인 정화분과위가 주축이돼 예정됐던 폭넓은「사회개혁」작업을 추진했다.
제거·근절·척결·응징·엄단등 온갖 강성단어들이 권력형부정축재·공무원부정·시위·소요사태등과관련, 국가기강확립이란 이름아래 속속 발표됐다.
광주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고난신군부세력의 서슬퍼런 위세앞에서는 모두가 침묵했다.
도의정치·사회정의구현을 표방하고 나선만큼 거친 격랑이 일것이라는 공통된 관측속에서많은 사람들은 이같은 개혁작업이 권력기반의 공고화, 즉 대권에의 전초작업임을 느낄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군부는 정부관계자를통해『국보위설치는 최규하대통령이공약한 연내개헌·내년봄 선거라는정치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것이며 오히려 국보위가 설치됨으로써 비상계엄 존속의 필요성을 경감시키고 군을 하루빨리 본연의 임무에 복귀시키는데 도움이 될것』이라고 연막을 쳤다.
그리고 이미 힘이 빠지고 있던최대통령은 6월12일의「국가기강확립을 위한 특별담화」를통해『내년6월까지 정권을 이양한다』고 발표했다. 최대통령은 이 담화에서『중상과 모략, 왜곡과 선동, 그리고 권모술수나 극한투쟁등으로 고질화된정치풍토를 개선해 나갈것』이며 공직사회는 물론, 일반사회 정화운동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태풍이 임박했음을 느끼게 했다.
「과거에 대한 철저한 부정」. 이것은 새 옥조·새 정권출현에반드시 나타났던 역사의 법칙이다.
개혁주도세력으로 불리던 신군부도 이 역사의 룰을 어김없이 실천했다. 그리고 그들이 택한 실천교본은『한국군사혁명(5.16)사』였다.
5·16을 교과서로 삼아 당시의현실에 대입방안을 강구한것은 신군부가 언제부터 정권쟁취를 시도했을까하는 의문에 해답을 주는 대목이지만 당시의 관계자들에 따라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혹자는 10·26후라고 증언하기도하고 12·12사태 직후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5·16에 대한본격적인 연구·검토 작업은 4월들어서라는 것이 대체적인 정설이다.
『12·12사태후「이제는 어쩔수 없는것 아니냐」는 말이 각급 군동기생 모임등에서 공공연히 나왔읍니다. 방관할수 만은 없다는 얘기지요.그렇다고 무슨 구체적 방안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실무차원을 넘은 지휘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에는 이논의 여지가 있겠읍니다만 실무자로서 무엇을 딱하니 준비하지는 않았읍니다. 다만 분위기를 감안, 지시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내놓을 자료를 챙기려다 보니 역시 5·16때의 경과를 참고하게 되더군요.쉽게 찾을수 있고, 우리의 현실에 근사하고해서….』
당시 플랜작성에 핵심세력으로 참여했던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과거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은 결국 새로운 세력 등장의 필연성을스스로 제공하는것 아니겠읍니까.당연한 귀결로 과거를 속죄양으로단죄하고 다음단계로 위무시책을 펴는 거지요』
그의 말대로 5·l6때처럼 드러내놓고 시작한 작업은 아니어서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형태는 거의 일치한다.
국가재건최고회의-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부정축재자 단속·재산환수-권력형부정축재 재산환수, 관기확립·숙정-공직자 정화, 폭력배등의국토개발단 편입-삼청교육대, 언론·종교계 정비-언론·종교인 정화, 정치활동정화-정치풍토쇄신등 모든사법·행정조치들이 하나같이 궤를같이했다.
다만 극도로 악화된 경제상황을고려하고 5·16당시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부정축재자 처리에 있어 기업인을 제외시키고 권력형부정축재자에 국한한 것이라든가, 80년2월 보안사 모중령(현재준장)에 의해 추진된 종교기본법제정이 종교계의 거센 반발을 의식, 무산된것등 아주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을뿐이다.
과거에 대한 부정은 1차적으로오늘의 장애물이 되는 과거의 제거를 뜻한다. 연행·검거의 회오리는 그래서 일어났다.
김대중씨로 대표되는 재야인사 예춘활·문익환·김동길·인명진·고은·이영희씨등도「사회혼란조성및학생·노조소요관련배후조종혐의자」로 연행됐다.
정치활동 전면중지와 전국대학휴교조치를 동반한 5·17계엄확대에대한 어떠한 도전행위도용납치 않겠다는 결의의 표명이었다.
「서울의 봄」을 이끈 3김의 또다른 하나인 김영삼신민당총재는 검거·연행대신 가택연금조치를 당했다. 별 뚜렷한 연행 명분이 없는탓도 있었다.
국민들의 기대와는 엉뚱한 것이었지만 어쨌든「서울의 봄」의 단골 수식어였던「안개정국」이란 말은 이때부터 필요가 없게됐다.
안개속에 가려있던 권력의 실체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계엄당국은 이와 함께 5·18광주사태로 온 나라가 극도의 혼미속을 헤매고 있을때 대법원에 고박정희대통령 시해사건 관련 김재규전중앙정보부장등에 대한 재판을서둘러 종결짓도록하고 확정판결불과 4일만인 5월24일 김을 비롯한 관련자 5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4일만에 사형을 집행한 것은 전례가 드믄 일로더이상 불씨를 남기지 않으려는신군부는 광주사태의 혼란시국에이를 마무리했다.
또 5월21일에는 국민들의 의구심을 던다는 목표아래 17일 연행된 김대중씨에 대한 장문의중간수사내용을 발표했다.
계엄사는 김씨가『대중선동→민중봉기→정부전복의 구체적 실천을 위해 복직교수와 복학생을 사조직에편입하여 각대학과 연계강화를 하면서 추종분자들의 연대의식과 투쟁의욕 고취를 위해김대중초상을음각한 신표와 볼펜을 나누어 주는동시에 학원소요사태를 민중봉기로유도시킬것을 기도했으며, 표면상으로는 국민과 학생·근로자들의 자제와 자숙을 강조하면서 이면적으로는 소위「민주화추진 전국민운동」을 내세워 학원사태를 배후 조종하였는바…』라며 그가 5월22일 일제봉기를 획책했다고 주장했다.
중간수사발표는 또 김씨가 좌경화된 위험인물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해 김씨의 사상적 배경을 열거하면서 김상현·김종완·김녹영·이택돈·이문영씨및김대중씨의 아들 홍일씨와 서울대·고대·연대생등 3명도 연행조사중이라고덧붙였다.
앞뒤를 재고 형식과 절차를 따질 겨를이 없었던것 같다.
최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한 인사는『정당한 절차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눈빛조차 달라졌다. 광주사태로 갈데까지 간 눈치였고 거리낌이 없었다』고 술회한다.
모든것은 계획대로 진행됐다. 이원집정부제설로 공연히 곤욕을 치르던 신현확내각이 광주사태등을 이유로 기다렸다는듯 일괄사표를 내고 박충훈내각이 들어서는등 정국이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있는 가운데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이학봉보안사 대공처장겸 수사국장의 지휘아래 추후의 분위기 쇄신을 위한「첫 작품」을 내기에 분주했다.
보안사 분실이 그 작업장이었고재료는 권력형부정축재혐의로 연행돼온 김종필공화당총재등 구여권의내노라하는 인사들이 그 대상이었다.
김총재등 구여권인사 9명의 부정축재재산 8백53억원 환수조치는그렇게해서 국보위발족 보름여만인6월18일 발표됐다.「과거의 청산」이란 상징이 필요했던 것이다.
계엄사는 이들이 기업인 협조비·이권개입·공금착복·부동산등으로 치부했으며 형식상 장학재단에 기부하거나 타인명의로 분산 또는 은행 비밀구좌에 예치했었다고 밝히면서 만원단위액수까지 자세히 발표함은 물론, 여자관계등과 함께 조사결과 무혐의 처리된 것까지 자료로 제공하는등 수사의 신뢰성을 높이도록 애썼다.
김공화당총재를 비롯한 이후락 전정보부장, 박종규 전대통령경호실장, 김치열 전내무장관, 김진만 전국회부의장, 오원철 전청와대 경제제2수석비서관, 김종낙코리아타코마사장·장동운 전원호처장, 이세호 전육군참모총장등 9명은 국보위 발족전인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조치가 있기 직전인 밤10시부터 11시 사이에 행동을 개시한 계엄군에 의해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 조사를 받았다.
신군부는 이들을『국민의 지탄을받아온자』라고 매도하면서 구여권을 상징하는 이들에 대한 단죄를통해 국민의 반사적 지지를 꾀하는 한편, 더이상「선배」가 아닌 이들이 물러나는데 따른 공백을 메울 세력에 대한 대망을 기대했던것 같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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