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혈통' 보내는 김정은의 판 흔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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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의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원 안)이 지난해 12월 21일 열린 노동당 제5차 세포위원장대회 주석단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왼쪽)의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원 안)이 지난해 12월 21일 열린 노동당 제5차 세포위원장대회 주석단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이른바 ‘백두혈통’을 국제 사회에 등장시키는 전례 없는 판 흔들기로 나섰다.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평창 겨울올림픽을 북한 체제 선전의 무대로 삼으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지만 북한이 국제 사회의 제재에 대한 압박이 극에 달해 '김여정 카드'까지 빼들었다는 관측도 있다.

 북한에서 ‘백두혈통’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그중에서도 김정은의 직계 여동생인 김여정은 ‘곁가지’인 다른 친인척과는 무게감이 전혀 다르다.
 대북 소식통들은 7일 “김정은 앞에서 자기 얘기를 할 수 있는 북한 내 유일한 인사가 김여정”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남북 관계 사상 처음으로 직계 가족을 한국에 보낸다는 자체가 대남 메시지이자 대미 메시지라는 분석이 잇따른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연구실장은 “여동생을 대표단에 포함시킨 것은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해 그만큼 진정성이 있음을 대내외에 과시하면서 남한과의 협력 가능성을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도 “여동생을 내려보낸 건 향후 남북 관계를 전격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김여정의 북한 내 존재감으로 볼 때 당연히 김정은의 친서나 구두 메시지를 갖고 온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 부부장(빨간 원)이 방남하는 예술단을 전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당 부부장(빨간 원)이 방남하는 예술단을 전송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시에 '김여정 카드'는 미국을 의식한 조치라는 해석도 나온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김여정 파견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가 폐막식에 온다고 발표한 점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김여정의 방남으로 9일 개막식에 앞선 리셉션 등에서 방한하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일행과 조우가 이뤄질지도 최대 관심이 됐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북ㆍ미 접촉은) 저희가 일방적으로 할 수는 없고 양측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대화의 물꼬가 트일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펜스 부통령이 최근 대북 강경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어 북·미간 접촉이 성사될지는 불투명하다.

 김정은의 김여정 파견에 남북 관계 개선의 의지가 담겼다면 정부와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비핵화 대화 가능성까지 포함했는지는 불투명하다. 이보다는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김정은이 핵 무력 유지를 전제로 해서 북한을 국제 사회에서 정상국가로 등장시키려는 시도 아니냐는 분석이 더 지배적이다.
 김정은의 전향적인 움직임에 대해선 '제재 압박'이 주요 원인이란 분석도 있다. 최근 탈북한 전 북한 고위층 인사는 "김정은이 자신의 여동생을 남한에 보내는 일은 북한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도박에 가깝다"며 "국제사회의 제재로 북한 상황이 매우 급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북한이 이날 발표한 대표단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제재 대상 인사가 포함됐다. 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은 지난해 6월 채택된 안보리 결의 2356호에서 제재 대상으로 지정됐다. 안보리의 제재 대상으로 지정되면 자산 동결은 물론 여행도 금지된다. 유엔 회원국 입국이 금지되고, 회원국 내에 있으면 즉시 출국해야 한다. 최휘의 한국 입국은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는 뜻이다. 정부는 예외 인정을 추진 중이다. 정부 당국자는 “안보리 결의에는 예외를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명시돼 있다”며 “이에 따라 북한 고위급 대표단에 대한 예외 인정이 가능할지 미국 및 안보리 산하 대북제재위원회와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김여정은 안보리 제재 대상은 아니지만 미국 재무부의 독자 제재 대상에 올라 있다. 우리 정부의 제재 대상은 아닌 만큼 입국에 문제는 없지만 한ㆍ미 관계를 감안하면 미국과의 사전 협의가 필요하다. 특히 국무부는 지난해 1월 김여정(당시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을 제재 명단에 올리며 “선전선동부는 검열을 주관하는 부서로, 억압적으로 정보를 통제하고 북한 주민들을 세뇌하고 있다”고 인권 탄압을 이유로 들었다. 북한에 억류됐다가 미국에 귀환한 뒤 사망했던 미국인 오토 웜비어의 부친이 펜스 부통령과 함께 방한한다는 점에서 미국 정부로선 민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여정 파견에는 대북 제재 완화와 한ㆍ미 갈등 유도라는 숨은 수도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채병건ㆍ유지혜 기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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