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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연막탄 속에 목총 들고 기었던 고교 교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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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 ㉙ 한상용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1962년 4살 때 다섯살 위인 형과 찍은 사진이다(왼쪽이 형, 오른쪽이 나). 내 인생의 멘토였던 명석하고 따뜻한 품성의 형은 5년 전 뇌출혈로 쓰러진 뒤 기억을 잃고 요양시설에서 투병 중이다. 나는 한 달에 두세번 찾아가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을 만나 뵌다.

형과 같이 찍은 옛날 사진을 보여주며 기억을 되살리려 애를 쓰지만, 소용이 없어 안타깝다. 그래도 형과 사진을 보며 옛날얘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어릴 적 즐거웠던 추억에 젖어 들곤 한다.

1970년 어머니가 의정부에서 운영하던 구멍가게 앞에서 나란히 서 계신 부모님 모습이다. 44년 전 50세에 돌아가신 아버지와 21년 전 72세에 돌아가신 어머니. 너무 보고 싶다.

내가 중학교 2학년 학기 초일 때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는 그해 겨울까지 앓으시다 치료비로 당신이 일구신 가산을 거지반 소진하고 돌아가셨다. 이로 인해 나의 서울로의 유학(전학) 꿈은 무산됐고, 어머니의 작은 구멍가게가 그나마 남은 가족의 유일한 생활 방편이 됐다.

나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제대로 학업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죄송스럽지만, 직장을 얻어 정착하기까지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다. 이후 2014년 경기도 양주에 작은 농막을 마련하고, 주말이면 서울 쌍문동 집에서 가족과 쉬러 간다.

2016년 부모님의 묘소를 농막 마당에서 바라다보이는 공원묘원으로 옮겼다. 허리를 펴고 바라보면 거기 두 분이 계셔 행복하다.

1975년 의정부고교 2학년 교련 열병식 때 모습이다. 맨 앞에 선 이가 학생회장이면서 연대장인 나다. 그해 봄 ‘학풍을 쇄신하고 정신력을 배양하며 배우면서 지키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고교에도 학도호국단을 설치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사회는 점차 암울한 회색 시대가 되어 갔다. 이 시절 운동장을 연병장이라 불렀으며, 한수 이북 고교 교련 경연대회도 의정부공설운동장에서 열렸다. 훈련은 목총을 들고 연막탄이 터지는 가운데 철조망 사이를 낮은 포복 자세로 통과하는 식으로 살벌하게 진행됐다.

고교 시절 학도호국단 간부로 외부 행사에 참여하다 보니 여학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달달한 연애편지도 꽤 많이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1981년 육군 통신대 유선 중대에서의 군 생활 모습이다. 당시 대학에서 교련을 이수하면 3개월의 현역복무 기간 단축 혜택이 주어졌다. 나는 2년제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교련을 이수하지 못한 상태로 입대해 33개월 복무 기간을 꽉 채우고 제대했다.

전역신고식 자리에서는 사회 진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암울한 가정형편 등이 떠올라 한참을 울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해 친구들보다 고교 졸업 후 대학과 사회생활이 많이 뒤처진 게 걱정돼 그랬던 것 같다.

2014년 6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지은 작은 농막. 아내에게 취미인 텃밭 가꾸기를 즐기도록 해 주고 전원생활의 여유 선사하려 농막을 마련했지만, 지금은 내가 아내보다 농막 생활을 즐기고 있다.

주말이면 지인들이 놀러 와 삼겹살도 굽고 악기연주 등의 여흥을 즐긴다. 텃밭을 가꾸는 것도 재미있지만, 공기 맑고 조용한 곳에서 갖는 조촐한 음악회나 술자리가 한없이 평화롭고 즐겁다.

가끔 이제는 삶의 여유를 찾은 우리 58년 개띠 세대야말로 대한민국 문화예술의 중심 소비층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해 6월 17일 의정부고교 선후배들이 농막에 모여 나의 2년 후배인 유호명 경동대 홍보센터장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던 모습.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나다.

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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