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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이 사고도 ‘거리’ 두는 이유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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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29면

8일부터 세계 패션위크의 막이 오른다. 시즌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미리 주목받는 쇼가 있기 마련인데, 개인적으로는 3월 4일 파리에서 열리는 ‘폴 푸아레(Paul Poiret)’ 쇼에 눈길이 간다.

파리 전설의 브랜드 #‘폴 푸아레’ 재론칭

패션 좀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이름을 모를 리 없을 터다. 폴 푸아레(1879~1944·사진)는 패션사에 빼놓을 수 없는 디자이너다. 1903년 파리에서 폴 푸아레 하우스를 설립한 이후 그가 보여준 ‘최초’는 한 둘이 아니다. 허리를 조이는 코르셋을 없애고 직선의 모던한 드레스를 선보이는가 하면, 기모노 코트를 오뜨 꾸뛰르에 내놨다.

1925년 세계 최초로 미니스커트를 만들기도 했다. 그뿐이랴. 지금 패션 하우스들이 너나없이 하는 향수 사업 역시 그가 처음이었다. 1911년 시그너처 향수인 로잔드를 론칭했는데, 샤넬보다 10년 앞선 행보였다.

하지만 ‘패션의 왕’이라 불리던 그의 영화로운 전성기도 한때였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코코 샤넬이 대세로 떠오르며 파산 위기를 맞아 1924년 브랜드를 팔았고, 6년 뒤에는 매장까지 문을 달았다.

이번 패션쇼는 거의 한 세기만에 이 전설적 브랜드의 부활을 알리는 자리다. 이것만으로도 뉴스인데, 사실 관심가는 이유는 더 있다. 바로 이 부활의 주체가 한국 패션기업 신세계 인터내셔날(SI)이기 때문이다. 2015년 ‘폴 푸아레’에 대한 전세계 상품권을 인수한 SI는 이듬해 프랑스 파리 현지 법인을 설립했고, 지난해 7월엔 ‘부활 프로젝트’를 예고했다. 디자이너로는 중국계로 프랑스에서 주목 받는 신진 이킹 인(Yiqing Yin)을, 전문 경영인으로 ‘앤 드뮐미스터’와 ‘하이드 해커만’을 거친 앤 차펠(Anne Chapelle)을 발탁하면서다.

이런 사실이 국내에는 크게 보도되지 않았는데, 배경이 있다. 브랜드에 대한 SI의 ‘무관여’ 정책 때문이다. 언론에 보도자료를 뿌리며 적극적 홍보를 하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는 그 이유를 간단하게 답했다. “글로벌 브랜드를 만드려는 거니까요. 한국 기업이 상표권을 인수했지만 프랑스 브랜드니까 모든 실무를 철저히 파리 법인에 맡기는 거죠.” 그는 “카타르 왕가가 발렌티노를 산 이후에도 발렌티노는 여전히 이탈리아 브랜드로 남아 있다”는 예도 들었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이, 지자체가, 정부가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겠다면 공식은 하나였다. 국내 디자이너나 브랜드를 성장시켜 세계 시장에 알리겠다는 것.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이 이를 목표로 삼았다. 또 MCM(독일)이나 콜롬보(이탈리아) 등 한국 기업이 인수한 해외 브랜드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기용하며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하지만 SI는 보다 현실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이름을 가지고, 현지 인력을 통해 다른 출발선에 선 셈이다.

냉혹한 비즈니스 정글에서 명분보다 실리를 택한 기업을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폴 푸아레의 부활을 향한 관전 포인트는 분명해졌다. 전제 조건을 바꾼 지금, 역으로 글로벌 브랜드 만들기를 위한 우리의 한계가 무엇인지, 가능성이 어디까지인지 파악해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거리를 두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를 찾아내는 게 또다른 과제일 터다. ●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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