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책 속으로] 로마·밀라노·토리노에서 건진 성찰 “세상과 인간은 왜 나아지지 않을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나의 이탈리아
인문 기행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반비

“서른두 살부터 서양미술 순례를 시작하여 지금은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서경식(67·도쿄게이자이대학 현대법학부 교수)씨는 세월을 잊은 도발적 질문자다. 여행에서 보고 들은 미술 작품과 음악을 바탕에 깐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주며 현재진행형 의문부호를 던진다. “인류가 앞으로 인종, 민족, 종교 같은 장벽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해갈 수 있을까요?” 재일조선인 2세인 그의 이름을 1992년 한국에 처음 알린 『나의 서양미술 순례』로부터 지금까지 ‘세상과 인간은 나아지지 않았다’는 그의 자각은 우리 시대가 처한 위기를 환기시킨다.

2014년 봄, 로마를 출발해 페라라, 밀라노, 토리노를 거친 이탈리아 기행에서 그는 ‘인문학’적인 정신을 복고(復古)하기보다는 오늘이라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재건하기를 희망했다. 그림이건, 음악이건, 유적이건, 사람이건, 그에게는 모두 ‘지금 여기’가 인간답게 굴러가고 있는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작동한다.

로마 시내 곳곳을 걸으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성을, 그 잔혹함과 어리석음까지 놓치지 않고 가차 없이 그려낼 수 있었던 바로크 화가 카라바조(1573~1610)의 작품에 매혹된다. 타협 없는 인물 묘사로 현실을 응시하는 카라바조는 그의 눈에 혁명가로 다가온다. 유대계 이탈리아인이었고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였던 프리모 레비(1919~87)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유대인의 풍경’을 찾아 나선 길에서 카라바조가 그렸던 세계를 다시 만난다. “아주 가까운 과거에 이와 같은 참극이 일어났다는 사실, 21세기인 지금도 우리는 그런 가혹하고 무참한 현실에서 빠져나올 방도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 다시금 막막해진다.

밀라노로 가기 위한 환승역 볼로냐에서 조르조 모란디(1890~1964)를 회상하는 대목도 그답다. 정물화를 주로 그린 이 이탈리아 화가를 은밀하게 좋아한 이유조차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75년 교포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됐던 두 형은 살아서 출소했고, 그는 글쟁이가 되어 대학에 직장을 얻었으며 함께 여행할 동행도 생겼다. 점점 불만 없는 일상에 접어들었지만 마음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평안을 찾지 못한다. 일본의 한 지인은 그에게 “그렇게 땅바닥에 구멍을 파고서 들여다보기만 해선 안 돼요”라고 했다지만, ‘진실은 이럴 리가 없어’라는 감각으로 만물을 바라보는 그는 말한다. “진실은 더욱, 더욱 어두운 것이라고.”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