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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는 거저 오지 않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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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현영 기자 중앙일보 경제에디터
박현영 중앙SUNDAY 차장

박현영 중앙SUNDAY 차장

이성 친구로부터 검찰 내 성추행 사건에 대해 남자들끼리 나눈 대화를 전해 들을 기회가 있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답이 아닌, 실제 한국 남자들의 반응이 궁금하던 터였다. 서지현 검사가 폭로한 안태근 전 검사장의 성추행 사건에 대해 “아직은 일방적 주장 아니냐”는 불신론, “오래전 일이 조사가 되겠냐”는 회의론, “세상에 불이익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로…”라는 냉소적 시선을 보였다고 한다. 여성의 분노와는 결이 다르다.

나는 서 검사의 글과 인터뷰를 보면서 그의 주장을 믿게 됐다. 나도 수없이 목격하고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신입 기자 때 출입처 고위 간부가 여기자를 성추행하는 장면을 바로 앞에서 목격한 적이 있다. 십 수 명이 둘러앉은 회식 자리였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뒤에서 끌어안고 더듬었다. ‘환각이 아닌가 생각했다’는 서 검사의 표현 그대로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냐며 내 눈을 의심했으니까.

사회생활 웬만큼 한 여성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성추행 스토리 하나씩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노래방에서 억지로 블루스 한 번 안 춰본 대한민국 여성 직장인은 아마 없지 않을까. 두려움 때문에 침묵할 뿐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도 ‘미투(Me Too)’ 캠페인이 상륙했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미투’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사건이 앞서 일어난 수많은 성추문 사건과 달리 폭발력을 가진 이유는 뭐였을까. 전문가들은 성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유명인인 점,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유효한 변화를 얻기 위해 필요한 양)가 달성된 점을 주요 요인으로 꼽는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 여성의 증언을 대중이 잘 믿어주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피해자가 유명인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본다는 것이다. 일종의 스타 파워다.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연방대법관, 2000년대 코미디언 빌 코스비 성추행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피해 여성의 인지도가 낮은 탓에 파급력이 작았다. 크리티컬 매스도 중요하다. 뉴욕타임스 첫 보도에서 배우 애슐리 저드가 성추행 폭로의 문을 연 것도 중요하지만, 닷새 뒤 귀네스 팰트로와 앤젤리나 졸리가 합류한 게 결정적이었다는 의미다. 이후 피해자 90여 명이 피해를 증언하면서 ‘와인스타인 효과’가 세계로 퍼졌다.

한국에서도 ‘미투’가 이어지려면 힘 있는 여성이 앞장서는 게 필요하다. 제2, 제3의 서지현이 나와야 한다. 우디 앨런 영화에 출연 거부를 선언한 콜린 퍼스처럼 힘 있는 남성의 역할도 중요하다. 조직 내 성폭력과 성차별적 문화를 바로잡을 기회가 열렸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박현영 중앙SUNDAY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