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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유권자 따로 노는 희극무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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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장대깃발이 나부끼고, 후보들의 큼지막한 사진이 든 피킷이 흔들리며, 입구안팎에 격렬한 구호들을 담은 대자보들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합동 유세장은 한마디로 혼란스럽게 동요하고 있었다. 연단 앞은 후보들의 운동원들이 모두 차지했고, 유권자들은 뒷전으로 밀려나 정견을 듣고 있었다. 16일 하오2시 서울 관악을구 합동 연설회장. 운동원들이 그들의 지지후보를 연호하는 것도 소란스럽다.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정책제시로 열기 속에 시종되는 서구의 질서정연한 선거풍경과는 너무나 다른 현상이다.
후보들이 입에 거품을 품고 말을 쏟고 운동원들이 아우성을 지르는 것과는 달리 유권자들은 무관심한 듯 무척 냉담한 표정들이었다. 유권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번 선거는 홍도 나지 않고 재미도 없는 맥빠진 정치결전장이다. 선거해 봤자 정권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후보들의 정견 속에서 미래의 행복을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야권후보들은 모두 입을 맞추기나 한 듯 전대통령일가의 비리를 폭로하고 민주화에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똑같은 말을 하는 야권후보들이 4∼5명씩이나 되니 유권자들의 머리는 더욱 혼란스럽고, 이들이 애걸복걸하듯 『견제세력을 달라』는 목소리들에 유권자들은 식상한 듯한 표정들이다. 수개월 전 대통령선거 때 들었던 똑같은 소리들의 반복뿐 새 정치란 구호와는 달리 새로운 내용의 정견이 없다.
야권후보의 난립은 유권자들의 판단을 오히려 흐리게 하고, 박수를 인색하게 하며, 정치 무관심의 단서를 제공하는 듯하다.
반면 후보들의 입장은 타이틀매치의 권투선수처럼 필사적이다. 과거처럼 2등 당선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사활을 건 싸움일수밖에 없다. 여당후보는 권위주의 탈피를 내세우고 여당내의 야당, 또는 개혁파임을 선전한다. 야당후보들은 야당의 체질개혁과 통합을 부르짖고 제각기 모두가 민주투사임을 과시한다. 학생운동원들 사이에서『거짓말이다. 사퇴하라』는 소리들이 터져 나온다. 공화당후보에게는 『유신잔당 물러나라』, 민주·평민당 후보에게도『믿을 수 없다. 물러나라』다. 여당후보가 등단하자 야권운동원들이 『민정당 몰아내라』고 고함지르며 모두 퇴장한다. 여당후보는 『우리정치가 이래서 민주화 안 된다』고 응수, 유세장에 공허하게 울린다. 이 같은 싸움에도 유권자들은 말없이 지켜볼 뿐 별 반응이 없다.
이 나라 정치는 어디로 가는가. 정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갈등을 풀어 국민들, 즉 사회각계층의 외화감을 없애고 연대감의 끈을 만들어 서로 화합시킴으로써 국민을 통합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사회의 기본갈등을 풀 수 있는 법과 제도를 만드는 것이 입법부의 중요기능이다. 5명의 후보들이 열변을 제각기 토했지만 핵심부분이 모두 빠져있다. 여당의 선심공약이나 야권후보들의 책임 없는 민주화 공약만으로 사회의 갈등이 풀릴 수 없다.
우리정치가 유권자와 따로 노는 희극무대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군정28년의 유산으로 국회의 시녀화를 들 수 있겠다. 지금 우리사회를 규제하고 관리하며 경영하는 거의 모든 제도와 법이 국민의 의사를 묻지 않고 제정되었다.
집권자와 집권세력의 사리와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우리를 지배해 왔다. 지금까지 의원입법이 거의 없었고, 유신 때의 비상국무회의나 5공화국 출현 때 국보위의 입법들이 우리사회를 계속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전경환의 새마을비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반증해준다.
또한 정치권내부의 갈등이 사회를 불안하게 한다. 『민정당 안의 개혁파』라고 여당후보들이 말하듯이 여권내부에 강온 양파의 대립이 잠재해 있고 모두가 알다시피 야권의 두 김씨가 조장하는 계파정치의 갈등도 있다. 이 정치갈등은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풀렸어야 했다. 그런데 이것이 거꾸로 더욱 첨예화된 형태로 이번 선거에 나타난 것이다. 이 정치갈등이 오늘 정치가 풀어 주어야할 사회갈등을 뒷전으로 밀어내 선거쟁점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우·현대 등 많은 산업현장에서 터지기 시작한 노사간의 분쟁에 모든 정당들이 무관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권이 이 모양인데 유권자들이 선거에 흥미를 느낄 리 없다. 여야 모두 유권자의 행복을 외면한 그들끼리의 정치투쟁에 유권자는 선거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야권이 기대하는 바람이란 더욱 일어나기 어렵다. 유권자들에게 구악으로 보이는 이 정치공해를 정치인들이 스스로 풀고 제거할 능력이 없다. 사회불안을 해소시켜야 할 정치가 역으로 사회긴장을 더욱 조장하고 있다. 몇몇 유세장들에서 정치폭력이 등장한 것은 유권자들을 더욱 불안에 떨게 한다. 이 모두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실종된 탓이다. 이제 우리는 무능정치를 선거를 통해 심판하여 정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이상 더 마음졸이며 정치판의 악순환에 매달릴 수 없다. 우리 유권자들은 이번 선거를 정치공해를 깨끗이 정화하는 계기로 삼아 깨어있는 한 표를 행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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