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동네 헬스보다 못한 중소병원 1000곳

중앙일보

입력 2018.01.29 02:30

업데이트 2018.01.2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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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밀양시의 한 병원 복도에 있는 소방용 구조대에 수술용 시트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이은지 기자

밀양시의 한 병원 복도에 있는 소방용 구조대에 수술용 시트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이은지 기자

28일 오전 대구시 달서구 신라병원은 전날 화재로 인해 건물 곳곳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당직실 전기장판에서 불이 시작돼 순식간에 연기가 차올랐다. 입원환자 35명이 무사히 대피해 인명피해가 없었다. 이 병원에도 스프링클러는 없었다.

스프링클러 소방안전 기준 허술
상가 건물 입주 동네의원은 설치
단독건물 중소병원 안 달아도 돼

주상복합건물에 많은 헬스장
회원 100명만 돼도 설치 대상

같은 시각 경남 밀양시의 한 병원. 여기에도 스프링클러가 없었다. 병실 창문이 한 뼘 정도 열릴 정도였다. 창문을 깰 만한 손망치도 없었다. 5층 복도 구조함에는 수술용 시트가 널려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거기에는 비상시에 던지면 수직 강하용 탈출기구로 변하는 슬라이딩 원통시설(워터 슬라이더와 유사)이 들어 있다. 목발·화분·의료기기들이 소화기를 가리고 있고, 어떤 데는 소화기 대신 파쇄기가 놓여 있다. 이 병원은 화재 대피 훈련을 하지 않는다. 병원 직원은 “입원기간이 1~2주일이어서 교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38명의 사망자를 낸 밀양시 세종병원 같은 화재 취약 중소병원이 1000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중소병원의 소방안전 기준이 동네의원이나 헬스클럽보다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상일 울산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동네의원 환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지만 중소병원 환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중소병원 소방안전 기준이 더 약한 것은 말이 안 된다. 거꾸로 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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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병원은 30~99개 병상을 갖춘 곳이다. 지난해 7월 기준으로 일반병원 857개, 한방병원 304개 등 1161개인데 이 중 세종병원처럼 독립건물에 입주한 1000여 곳이 문제다. 중앙일보 취재진은 28일 전국 중소병원 17곳을 긴급 점검했다. 이들은 ‘4층 이상, 바닥면적이 1000㎡ 이상’ 기준에 해당하지 않아 스프링클러를 단 데가 거의 없었다. 현행 소방법은 건물 특성을 별로 고려하지 않고 층·면적을 기준으로 안전 기준을 정한다. 중소병원은 건물이 높지 않고 연면적이 크지 않다. 이 때문에 중소병원의 소방 기준은 동네의원이나 헬스클럽보다 못하다.

경기도 과천시 별양동의 한 5층 건물의 4층에 입주한 동네의원에는 간이스프링클러와 화재감지기가 설치돼 있다. 현행 건축법에는 동네의원·한의원·치과의원을 근린생활시설(1종)로 분류한다.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는 근린생활시설의 바닥면적 합계가 1000㎡ 이상이면 모든 층에 간이스프링클러를 설치하게 돼 있다. 주상복합 같은 복합건물은 건물 총면적이 1000㎡ 이상이면 간이스프링클러를, 5000㎡ 이상이면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게 돼 있다. 동네의원에는 최소한 간이스프링클러라도 설치한다. 수용 인원 100명 이상인 헬스클럽 등의 체력단련장은 스프링클러를 설치해야 한다.

세종병원 같은 중소병원은 벽지·천장재료·칸막이 등의 실내장식물에 방염처리를 안 해도 된다. 세종병원 화재 때 방염처리 하지 않은 시설물의 유독가스 피해가 너무 컸다. 하지만 실내 운동시설, 근린생활시설 중 숙박시설 등은 일정 기준 이상의 방염 기능이 있는 실내장식물을 설치해야 한다. 의료시설 중에는 1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과 요양병원, 정신의료기관만 적용된다.

중소병원, 천장 등 방염처리 안 해도 돼 … “의료기관 소방안전 더 엄격해야” 

부산시 동구 동네의원인 범일연세내과(462㎡) 벽지는 모두 방염 벽지다. 지난해 초 실내에 칸막이(격벽)를 설치하면서 일반 벽지를 썼다가 소방점검에서 적발돼 방염 벽지로 바꿨다. 여기에만 200만원 이상 들었다. 이동형 원장은 “11층 건물 7층에 들어 있는데 건축법상 근린생활시설로 돼 있어 방염 벽지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병원은 소방안전 기준이 약해서인지 곳곳에 허점을 드러냈다. 28일 오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의 한 한방병원. 건물 2층 베란다 문 밖에 대형 음식물쓰레기 수거함 2개가 놓여 있다. 직원이 쓰레기를 붓더니 문을 열쇠로 잠그고 사라졌다. 안에서 문을 열 수 없었다. 직원은 “금연구역인데 (환자들이) 담배를 펴서 문을 닫아놨다”고 말했다.

28일 서울 동작구의 한 병원 비상계단에 고무대야, 박스, 폐품 등이 가득 쌓여있다. 이에스더 기자

28일 서울 동작구의 한 병원 비상계단에 고무대야, 박스, 폐품 등이 가득 쌓여있다. 이에스더 기자

서울 동작구의 한 척추·관절병원 비상계단에는 폐품·고무대야·박스 등이 잔뜩 쌓여 있다. 모든 층의 비상문이 자동문이어서 화재가 나면 열리지 않을 위험이 커 보인다. 대전시 중구 한 병원에는 스프링클러가 없다. 비상대피로 안내도가 보이지 않았다. 4~6층 방화문이 열려 있다. 백동현 가천대 설비소방공학과 교수는 “복도와 계단 앞 일대에 피난 장애물을 놔두면 매우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대전 병원 환자 A씨는 “밀양 병원 화재 참사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입원해 있으면서도 불안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경기도 의정부시 한 병원의 환자 보호자는 “5층 건물의 병원에 스프링클러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허리가 아파 입원한 가족이 걱정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의료기관의 소방안전 기준을 엄격히 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상규 경남 소방본부장은 “중소병원은 새로 짓는 것뿐만 아니라 기존 병원에도 스프링클러나 자동소화설비를 설치하도록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 환자를 구조하는 데 한계가 있어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일 울산대 교수는 “다른 건물보다 의료기관의 소방안전 기준을 더 엄격하게 고치고 정부의 의료기관 인증평가에서도 소방안전을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신성식·전익진·최은경 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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