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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만지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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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22면

살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게 마련이다. 작년 독일 출장 도중 갑자기 오른쪽 눈이 검정 커튼을 두른 듯 컴컴해졌고, 불과 몇 시간 만에 앞이 보이지 않게 됐다. 평소 특별한 이상증세가 없었으므로 그야말로 날벼락을 맞은 느낌이었다. 눈앞이 캄캄하고 막막하다는 건 이런 경우다.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상상하니 공포가 앞섰다.

윤광준의 新생활명품 <75> 이원의 ‘브래들리 타임피스’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했다. 평생 나와 상관없을 것 같은 망막박리 진단을 받았다. 십만 명 가운데 한두 명 발생한다는 질환이다. 증상을 본 의사들은 모두 실명할 것이라 했다. 당연한 회복의 기대는 절망의 확인으로 참담하게 다가왔다. 수술대에 오른 내게 의사는 “안구를 함몰시키지 않으려는 수술”이란 말을 했다. 정상 회복의 기대는 품지 말라는 선고였다.

고개를 쳐들면 수술 효과가 없다는 이유로 한 달 가까이 엎드려 지냈다. 땅 바닥만 보고 지낸 시간은 더디고 지루했다.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의 고통을 비로소 헤아렸다. 눈 한쪽이 보이지 않을 뿐인데 불편은 엄청났다. 정상적 인간의 축복이 무엇인지 알았다. 무릇 인간은 닥쳐봐야 당연해 보이는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렇게 빨리 가던 시간이 환자 앞에선 멈춰버리는 모양이다. 하루가 평소의 며칠로 느껴졌다. 수시로 지금 몇 시냐고 물어봤다. 반복된 물음에 가족조차 짜증을 냈다. 듣거나 보지 않고 제 손으로 더듬어 알 수 있는 시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점차 시야가 터졌다. 흐릿하지만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의사의 말이 틀렸다.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시간의 마법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시각 장애인 친구 위한 배려를 아이디어 상품으로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김형수란 한국인 청년이 있었다. 함께 공부하던 강의실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클래스 메이트가 자주 몇 시냐고 물어봤다. 시각을 일러줬지만 그 친구의 손목엔 분명 시계가 있었다. 동료의 행동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소리로 시각을 알려주는 시각장애인용 시계가 수업을 방해할까봐 직접 물어봤다는 걸 알게 됐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시계가 아이디어로 떠올랐다. 시각장애인용 시계가 있었지만 티 나는 디자인으로 정작 당사자들은 쓰기 싫어했다. 누가 일부러 장애인임을 떠벌리고 싶겠는가. 결점을 가리고 싶은 인간의 마음은 다 똑같다. 여느 사람들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멋진 시계 디자인의 필요가 절실했다.

보지 않고 만져서 알 수 있는 시각의 확인은 사실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시계를 보지 않는 척 시각을 확인해야 할 경우가 생기지 않던가. 난처한 자리를 빨리 모면하거나 상대를 배려해야 할 때다.

시각이 손의 감촉만으로 파악된다면 요긴할 것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세상의 모든 시계는 보거나 듣는 용도로 만들어졌다. 만져서 알 수 있는 시계! 생각만 해도 재미있다. 스티브 잡스가 휴대용 전화에 터치의 감성을 입혀 세상을 바꾼 스마트 폰만큼 획기적인 발상이라 할 만하다. 모두가 내심 바랐을지도 모르는 당연한 시계의 형태는 디지털 전성시대를 거쳐 원시적 아날로그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만지는 시계는 김형수와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모양새를 갖춰나갔다. 세상에 갓 들어선 젊은이가 무슨 수로 적지 않은 개발비를 마련할까. 제품의 완성도를 확신할 단계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창업이 쉬운 게 미국의 풍토다.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 ‘킥 스타터’에 만지는 시계 ‘브래들리 타임 피스’의 내용을 올렸다. 세계의 눈 밝은 이들이 즉각 반응했다. 불과 여섯 시간 만에 목표 금액 4만 달러를 달성했고 순식간에 수천 개의 주문과 7억 원의 펀딩을 받았다. 처음부터 눈길을 끌지 못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모두를 위한 시계란 의미로 ‘에브리원(Every one)’에서 딴 ‘이원(eone)’을 회사명으로 정했다. 2013년의 일이다. 이후 전 세계에서 주문이 밀려 본격 생산을 시작했다. 이원의 성장은 우리가 보았던 잘나가는 회사의 성공 스토리를 그대로 빼 박은 듯하다.

첫 제품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두 눈을 잃은 미 해군 장교 브래들리 스나이더의 이름을 붙였다. 브래들리는 역경에 무릎 꿇지 않고 런던 패럴림픽에 참가해 수영 부문에서 금메달을 획득, 일약 미국의 영웅이 된 인물이다. 인간 승리의 표상이 된 이름은 새로운 시계에 적합했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는 보거나 만지거나 시계의 용도에 충실해 모두의 공감대를 이끌었다.

2014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팝스타 스티비 원더가 브래들리 시계를 차고 노래를 하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혔다. 스티비 원더가 눈이 보이지 않는 가수임은 대부분 안다. 세계적인 팝 스타는 제 손으로 직접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멋진 시계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른다.

해시계가 손목으로 … 독특한 디자인에 젊은층서 인기  

‘브래들리 타임피스’가 세계적 히트를 쳤기 때문에 주목해야 한다면 이유치곤 건조하다.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감촉을 동원한 시각 확인이란 아날로그적 속성의 강조가 더 돋보여야 옳다. 보고 듣는 익숙한 감각 대신 손끝에 느껴지는 촉감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손가락을 더듬이 삼아 조심스레 더듬다 보면 돌기의 감촉으로 시간조차 만져질 수 있다는 데 놀란다. 추상의 시간이 실물로 바뀌어 감각의 대상이 된 변화랄까. 멋진 디자인이 보는 즐거움을 주었다면 감촉의 신선함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꾸러미 하나를 더 받은 느낌이다.

티타늄 재질의 무광 문자판은 마치 돌판의 질감마냥 두텁게 다가온다. 시계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시침, 분침과 유리 커버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무브먼트와 연동하는 자석의 힘으로 쇠구슬을 구르게 했다. 위쪽의 작은 홈은 분 단위, 옆면의 홈은 시 단위의 시각을 표시한다. 눈으로 보면 일반 시계의 분침, 시침 역할과 똑같다. 덮개가 없어 고정할 수 없는 구슬은 제멋대로 구르다 흔들기만 하면 즉각 제 위치로 돌아온다. 전체의 모양은 익숙한 시계처럼 보이지만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촉각의 낯섦이 새롭다.

자판의 돌기와 형태, 재질이 어울려내는 독특함은 해시계를 연상시킨다. 들판에 돌을 박아 그림자로 시간을 재던 과거의 습속을 축소시켜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매끈한 날렵함 대신 투박하고 거친 조형물의 느낌이 묻어난다. 그렇고 그런 시계 디자인이 식상했던 젊은이들이 먼저 반응했다. 색다른 질감과 보는 맛의 매력은 스마트 폰에 밀려 용도가 줄어든 시계를 다시 찾게 했다. 차별화의 수단으로 쓸모 있는 모양이다.

소문만 무성하던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최근 들어서야 보고 써 봤다. 매장의 쇼 윈도우에 진열된 실물의 아우라가 강렬했다. 첫 눈에 범상치 않음을 알았다. 이럴 줄 알았다. 짧은 시간에 세계의 권위 있는 디자인상인 독일의 레드 닷과 IF 상을 2016년 연거푸 수상했단다. 게다가 런던 디자인박물관과 대영박물관은 브래들리 타임피스를 영구 소장품으로 선택했다. 빼어난 디자인 역량을 나라 밖에서 먼저 인정받은 셈이다.

한국인이 미국에 회사를 차렸다. 개발과 디자인에 유리했고 자본을 쉽게 모을 수 있어 선택한 거다. 시계는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조립된다. 국제 협업의 성과로 탄탄해진 브래들리 타임피스다. 시계를 본 이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뻔하지 않은 독특한 개성의 시계가 주는 매력에 쏙 빠져들게 된다나. ●

윤광준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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