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구태 뺨치는 새 시대 타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새 시대, 새 정치, 새 일꾼-.
13대 국회의원 후보들이 내건 집약된 구호다.
구시대의 낡은 정치와 시답잖은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신시대에 걸맞은 정치 행태를 강조하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후보들의 의지가 이 같은 간결한 구호로 공통 분모 화 된 것 같다.
그러나 지난 며칠 간 영남지역의 총선거 현장을 둘러본 결과 그럴듯한 이 구호가 얼마나 기만적이고 공소한 것인지 단박에 드러났다.
「새 시대, 새 정치」를 표방하기에 족한 새 일꾼이나 구 시대·구 정치의 낡은 일꾼 이건 간에 한결같이 구시대보다 더 못된 정치 행태로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혈안이 되고 있었다.
어느 특정지역을 꼽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물량공세는 대량화·다양화되고 있었다. 12대 총선 때만 해도 선물 가짓수가 많아야 수건·비누·1회용 라이터에 한두 종류가 더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웬만한 재력을 가진 후보라면 품목 자체를 10여 종류쯤 준비, 마구잡이로 뿌려 대고 있었다.
경남의 모 여당 후보는 수십 명을 갈비 집에 초청, 하루 저녁에 고기 값만도 2백30여 만원을 날렸다. 경북 모 야당 후보는 당원단합대회에 현금2천 원이 든 선물봉투를 3천 개 준비했으나 몰려든「당원들」로 금세 동이 났다고 했다.
대구의 한 여당후보는『유권자들이 손을 벌려 외면할 수가 없다』고 솔직히 토로했는데 상대방 야당후보는『여당 측이 한 모임에 10만원을 주고 있어 우리측도 2만원 정도는 보조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는 실정이다.
서로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돈이 있다고 보이면 20억 원 설, 30억 원 설을 퍼뜨리기가 예사였다.
온갖 흑색선전·인신 비방의 난무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정책대결 같은 고상한(?)품목은 끼어 들 여지가 애당초 없었다.
경북 경산의 한 농부는『농번기인데도 일손을 구할 수 없다. 하루에 당원단합대회 몇 군데만 가면 현금 1만원과 선물 등 여러 가지를 받는데 구태여 힘들게 일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새 시대 정치가 개악된 탈법·부정·타락선거 행위로 시작되는걸 보면서 13대 국회가 탈법·범법자로 채워지지 않을까 벌써부터 우려된다. <영남에서=이수근 정치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