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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는 연구 윤리 의식 없고 학계는 표절 판별 기준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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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억울합니다. 논문 문제가 아니라 학계 내부 갈등 문제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 일인데 운이 없는 거죠." 출처를 밝히지 않고 타인의 글을 베낀 한 교수의 말이다. 남의 논문을 수십 장 발췌해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교수는 "논문 요약도 학문적 성과"라고 주장한다. 전문연구자인 교수들조차 연구윤리에는 아마추어다. 학회나 대학도 윤리 불감증에 걸려있긴 마찬가지다. 국내에서 표절 시비에 오른 상당수 논문이 학계에서 면죄부를 받는 것은 부실한 제도와 시스템, 그릇된 관행과 윤리의식 때문이다. 연구부정을 '적발-판정-제재'하는 시스템이나 연구윤리에 대한 교육도 거의 마련돼 있지 않다. 김환수 국민대 교수(과학기술학)는 "제2, 제3의 황우석 파문을 막기 위해서는 지식사회 안팎에 다양한 윤리적 '인프라'를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다.

■ 정교한 윤리기준 필요
"한솥밥 동료를 어떻게 … " 온정주의 문제

"우리 학계에선 학자가 '한 솥밥 먹던' 동료를 처벌하기가 어렵죠. 한두 다리 건너면 다 선후배 사이인데 처벌이 되겠습니까."

(사회과학계열 학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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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의혹이 제기돼도 학계에선 이를 판정할 기준은 물론 관련자를 제재할 규정도 없다. 취재팀이 조사한 국내 40개 주요 학회 중 구체적인 윤리.표절 규정이 있는 곳은 한국심리학회 등 4곳에 불과했다. 관련자에 대한 제재까지 명문화한 곳은 한국행정학회 한 곳이다. 다른 학회는 논문 투고규정에 '독창적일 것' 같은 막연한 규정을 두고 있을 뿐이다.

구체적 기준이 없다 보니 학회 임원 등 몇몇 사람이 각자의 잣대를 앞세워 판정한다. 자연히 인맥과 학연에 좌우되거나 '온정주의'에 휘말릴 가능성이 크다.

허술한 제재 규정은 '솜방망이''고무줄' 징계 논란을 낳는다. 취재팀의 확인 결과 최근 5년간 표절 등의 이유로 논문이 취소된 사례는 7건. 이 중 단 두 건만이 연구자의 소속기관에 공식 통보됐다. 나머지는 '본인 경고'나 '해당 학술지 투고 금지' 에 그쳤다.

김문조 고려대 교수(기술사회학)는 "아직 학계엔 동료를 감싸는 특유의 '집단주의'가 남아있다"며 "이를 극복하려면 합리적이고 공개적인 잣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적발 시스템 갖춰야
"표절 여부 가릴 논문DB 없이 기억에 의존"

"부끄럽지만 표절 여부 감별은 심사자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공학계열 학술지 편집위원)

국내 학계엔 논문 부정을 잡아내는 '적발'시스템이 허술하다. 황우석 사건에서 보듯이 논문 부정은 동료나 같은 분야의 연구자들이 가장 잘 안다. 단순한 표절은 학계 외부에서도 외형상 비교적 쉽게 판별할 수 있지만 데이터의 조작.위조는 연구 참가자가 아니면 밝히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연구부정을 폭로하는 제보자를 거의 찾기 어렵다. 연구실의 내부고발자를 보호하는 법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공익제보자를 위한 모임'의 이지문 부대표는 "부패방지법에는 신고 대상이 국책연구소나 국.공립대로 한정되며 제보자의 신분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복.표절 여부를 가릴 때 필수적인 논문검색 시스템도 없다. 대부분의 학회가 다른 학회의 논문 검색에 어려움을 겪는다. 취재팀의 설문 결과 학술지 편집위원 40명 중 8명만 '논문심사 때 관련 논문 검색에 지장이 없는 편'이라고 답했다.

국내 학술지.학위 논문을 한곳에 모은 데이터베이스(DB) 역시 갖추지 못했다.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이 관련 사업을 추진 중이긴 하다. 국가청렴위원회도 10일 교육부에 내년 3월까지 '논문 종합DB'를 구축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학술지 논문의 저작권을 보유한 학회들이 협조하지 않는 한 완전한 시스템이 될지는 미지수다.

■ 연구윤리 가르쳐야
"대필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도 없어"

"후배라면 당연히 직장인 선배의 논문 실험을 대신하는 것으로 알았죠. 그게 큰 잘못인지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방대 석사과정 수료생)

논문 부정을 차단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연구자가 스스로 부정 행위를 경계하고 저지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한 해 수십만 편의 논문이 쏟아질 뿐 아니라 연구.실험의 규모가 커져 일일이 검증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본지가 설문조사한 학술지 편집위원 40명 중 25명(62.5%)이 부정행위 근절을 위해 '투고자의 양심 회복'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연구자들이 제대로 된 연구윤리를 배울 기회가 없다. 지난해 11월 생물학연구정보센터 설문조사에 따르면 생명공학연구자들은 '윤리교육을 받은 적 없다(51%)' '선후배.교수에게 간단하게 들었다(28%)'고 답했다.

시민과학센터의 김병수 간사(과학기술학 박사)는 "의대의 생명윤리강의를 빼고는 이공계 전공자를 위한 연구윤리교육이 전무하다"고 밝혔다.

인문.사회과학계도 사정은 비슷하다. 기존 저술을 많이 참조하는 학문 특성상 타인의 글을 옮길 때 출처를 밝히는 인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신입생 때 교양국어 수업에서 인용과 표절의 차이를 잠시 배울 뿐이다.

<취재팀>

◆ 허귀식.천인성.박수련 탐사기획부문 기자, 임미진 경제부문 기자, 변선구 사진부문 기자

◆ 제보 <=deep@joongang.co.kr>, 홈페이지(deep.joins.com), 02-751-5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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