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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2. 취직 축하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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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해 말 방동규씨 취직축하연에 모인 친구들. 일어서 있는 방씨 바로 옆자리에 시인 신경림씨가 보인다. 맞은편 아래부터 최민·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부영 전 의원, 유홍준 문화재청장 등이 앉아 있다. 안성식 기자

"방배추 형님이 취직 턱을 낸답니다."

내 아우 유홍준(문화재청장)이 소문을 그렇게 요란하게 냈다. 팩스와 e-메일 같은 사발통문을 불나게 돌린 모양이다. 지난해 12월 26일 저녁 서울 인사동 단골 음식점에 들어서니 망년회 시즌인데도 친구들로 가득했다. 내가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 이 된 것을 축하하는 모임이다. 문간의 젊은 여성 하나만 빼곤 낯익은 얼굴들.

언론인 출신의 임재경과 성유보가 자리 잡았고, 키가 꼭 내 허리춤까지만 올라오는 시인 신경림은 소주 몇 잔을 걸쳤는지 벌써 얼굴이 발그스레하다. 정치인 이부영씨도 보인다. 춤꾼 이애주와 불문학자 최권행 같은 대학교수들, 화가인 여운, 김용태(민예총 회장)와도 인사를 나눴다. 소설가 천영세와 문화관광부 장관 후보 내정자 김명곤은 미처 못왔단다. 얼핏 물었다.

"가만, 조오기 여성은 누구시지?"

"황석영씨 딸 여정이죠. 아버지 대신 형님을 뵙겠다고 왔어요."

그 말 끝에 내가 한마디를 던졌더니 사람들이 와르르 웃는다. 그 여성도 배시시 따라 웃는다.

"알아? 당신 아버지와 나는 '구라' 직계야."

아,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선의 3대 구라'로 백기완.황석영과 함께 나를 치지 않았던가. 그래서 던진 농담이다. 백 구라는 걸걸한 목소리로 만주벌판 얘기부터 꺼낸다 해서 '대륙 구라'라던가? 황석영은 질펀한 '육담(肉談) 구라'고 나는 그저 엉성한 이야기꾼일 뿐인데…. 어쨌든 그날은 무척이나 흥겨웠다.

지금 내 봉급이 94만원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현역은 현역 아닌가. 취직 턱을 빌미로 옛 친구를 부르니 정말 좋았다. 그날 친구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알음알음으로 엮인 귀한 인연들이었다. 나야 보증금 500만원짜리 허름한 집에 살지만, 친구 부자인 것만은 분명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구중서가 굳이 일어선다.

"한국 사회에서 70세에 취직한 사람은 배추밖에 없는 것 같아요.(웃음) 갑자기 옛날 생각부터 납니다. 배추와 저는 젊은 이상주의자 그룹 멤버로 출발했습니다. 10대 시절인 50년대에 만나 새 세상을 만들자, 그러기 위해 사회계몽을 벌이자고 의기투합을 했었지요."

자, 이제 내 삶을 털어놓으려 한다. 구중서 말대로 왜 나는 젊은 시절 철부지로 놀다가 백기완에게 맞은 따귀 한 방에 180도로 바뀌었는지, 그 이전에는 어떻게 10대 건달로 험하게 살았는지도 고백할 참이다. '낭만 주먹' 얘기도 조금은 털어놓을 모양이니 손가락질은 잠시 참아주셨으면 한다.

어제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그동안 위인전 따위에 속아왔는지도 모른다. 까짓것 한 세상이고 한 인생인데, 괜스레 과대 포장할 필요는 없다. 이제 중앙일보의 꼬드김을 빌미로 내 인생을 풀어내 본다. 시인 고은의 '만인보' 시리즈에 나오는 '배추 방동규' 얘기부터 해볼까?

배추 방동규

사진=안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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