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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 충성」이 전씨 비리 부채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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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경환씨가 29일 검찰에 출두하고 동서 황흥식씨 등 핵심 인물 5명에 대한 구속 영장이 집행됨으로써 온 국민의 관심을 모은 「새마을 비리」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특히 조사를 받던 황씨가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해 사건은 「드라마틱」한 긴박감조차 더한 느낌입니다.
―검찰은 이번 수사에서 특히 「외풍」이 전혀 없는 「검찰의 독자적인 수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어요. 검찰은 이번 수사를 통해 그 동안 「일그러져 온 검찰의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나름의 의지와 각오를 보이고 있습니다.
―실제로 검찰수사 착수 후 「관계기관 대책회의」 같은 것은 물론 검찰 상층부에서조차 실무적인 「지침」이나 「방향」의 시달 같은 것도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정해창 법무장관은 『오해를 살까봐 전화도 못하겠다』고 하더군요. 상부로부터 방해(?)가 없으니까 실무 검사들은 전에 없이 신명이 나는 분위기입니다.
―그러나 새마을 비리는 그 동안 신문보도 등을 통해 누차 문제 제기가 됐는데도 검찰이 능동적인 수사를 미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수사 요청이란 형식절차가 있은 뒤 21일에야 수사에 착수한 것은 이번 수사가 「독립적」일지는 몰라도 「자발적」은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현 단계에서 검찰권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일부 외국 언론을 통해 국내에서도 상당히 유력하게 유포된 추측의 가설도 그와 관련해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신문의 새마을 집중 보도가 제 5 공화국 세력을 견제하려는 제 6 공화국 세력의 「계산된 언론 활용」이 아니냐는 얘기지요. 얼른 들으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달라요. 새마을 수사의 기폭제는 정부의 유도가 아니라 직접적으로는 자유로워진 언론의 보도 경쟁이었습니다.
―새마을본부의 비리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5 공화국 시절인 지난해 감사원 감사 때였습니다. 영종도 개발 등 굵직굵직한 비리는 그때 모두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여론의 전면에 부각돼 수사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어요.
―이 문제를 정부이양 전 다시 새로운 이슈로 제기한 것이 중앙일보 보도입니다. 1월 22일 「새마을본부 감사 결과 흐지부지」라는 기사를 사회면 머리에 단독으로 다뤄 그 동안 세간에 나돈 의혹에 「칼」을 대게 하는 최초의 불씨를 붙인 셈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를 신호탄으로 도하 각 언론이 비리를 캐는 심층취재 작업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어요. 이달 중순께부터 경쟁적으로 비리폭로 보도가 나가기 시작, 결국 검찰이 수사에 나섰는데 18일 출국이 수사 착수를 앞당긴 결정적 계기가 됐습니다.
―일단 사건이 터지자 전씨의 새마을 비리는 그야말로 칡덩굴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얽혀 있었어요. 그러나 비리 관련자들이 철저한 거짓말과 묵비권을 행사해 취재하는데 특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1백%에 가까운 심증을 갖고 확인하려해도 시치미를 떼기 일쑤여서 우여곡절의 탐문·우회 취재를 하느라 많은 인력이 배치돼 밤낮없이 뛰었죠.
―때문에 검찰의 수사도 「해외 부동산 투기」 등 물증 확보가 어려운 의혹 사건들에 대해선 고전을 면치 못하고 겉돌리란 것이 관계자들의 얘기입니다.
―중앙일보는 본격 보도경쟁이 시작되면서 「새마을 연수비 4억대 유용」 「새마을 신문사 땅 1만여 평 처분 서둘러」 「우장산 공원 개발」 「영종 연수원 강제 입소로 7억 거둬」 「새마을본부 건물 대부분 무허가」 「영종 개발 총책 김진택 해외 도피」 등 굵직한 기사들을 연일 사진과 함께 특종으로 보도했습니다.
―전씨 주위에는 예쁘게(?) 보이려는 정계인사들의 과잉충성이 그치질 않아 오히려 「버릇을 나쁘게 만든」 감이 있죠.
―기금조성 명목으로 전시회를 할라치면 총리에서 장관·서울시장·국회의원들이 개인소장 고가미술품을 마구 내놓았고 향토 야시장엔 각 지방의 민정당 의원들이 보낸 특산물로 가득 찼어요.
―지난 84년 9월 잠실 아시아선수촌 아파트 건립 부지에서 새마을 야시장이 열렸을 땐 서울시장이 직접 상하수도를 긴급 설치케 했으며 한 간부가 『불과 며칠밖에 쓰지 않을 시설에 시민의 세금을 써야 하느냐』고 직언 했다가 『모른 체 좀 하라』는 면박을 맞은 일화도 있죠.
85년 6월 국회 내무위 답변 때는 『기합을 받으러 왔다』는 전씨에게 모든 민정당 의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고 답변이 끝난 뒤 『욕 보셨다』 『고생 많으셨다』며 위로까지 하더군요.
―야당의원들이 새마을을 권력과 연관시켜 공세를 취하면 『의제 외 발언을 하지 말라』고 고함을 치며 소란을 피우는 등 열성적으로 전씨를 보호한 인사들이 여권에 있습니다.
―전씨와 새마을 비리에 대한 수사는 언론의 잇단 폭로·고발보도가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지난 l8일 전씨가 돌연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수배된 범인」 취급을 받기 시작한 것이 수사를 앞당기는 작용을 했지요.
―20일 오후 김해를 통해 몰래 귀국한 전씨는 중부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에서 따라 붙은 취재차량을 따돌렸어요. 21일 오전 기세 좋게 새마을본부에 나타나 기자회견까지 하는 등 처음엔 당당한 자세를 보였습니다.
―전씨가 귀국 후 29일 검찰 출두 때까지 두문불출해온 서울 팔판동 집 앞에는 전씨를 취재하려는 기자들이 9일 동안 매일 밤낮 수 십 명씩 진을 쳐 주민들로부터 『경비만 삼엄하던 이 골목이 이처럼 북적거리기는 처음』이라는 말을 들었지요.
전씨 부부는 8박 9일 동안 외출은 물론 전화조차 가정부나 집 관리인이 모두 받아 처리하게 하는 등 그야말로 외부와 일체 접촉을 피해 취재기자들을 맥빠지게 했습니다.
―비리가 연일 신문지상에 폭로되면서 관련부처인 서울시와 내무부·문교부·체육부·건설부 등 관계간부들은 사건의 불똥이 자신들에게 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당시 누가 감히 전씨의 말을 거역할 수 있었겠느냐』고 「상황론」을 들먹이다가도 그에 따른 반대급부 등을 얘기하면 표정마저 굳어진 채 함구로 일관, 분노와 함께 측은감 마저 들 정도죠.
―새마을 본부관계 직원들도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예요.
벌써 상당부분 기구 축소가 된데다 본부 폐지설까지 나돌아 졸지에 일터를 잃게 될 위기에 처한 것이죠.
특히 전씨가 사주로 있던 새마을 신문사 직원들은 『종간 호를 낼 날이 임박했다』며 체념하는 모습입니다.
―전씨가 유도 회장과 유도대 학장·유도원 이사 등의 인선에 직·간접적으로 작용 해온 것으로 알려진 유도계에도 유도원 이사진 부정 인선과 관련, 퇴진한 이사들의 행정 소송 계류 등 현안들이 더욱 뒤엉켜 내분이 심화되지 않을까 큰 걱정을 하고 있지요.
―수사착수 후 언론사에는 『모든 의혹을 철저히 파헤쳐라』는 독촉과 함께 근거 없는 사소한 소문까지도 낱낱이 제보해 주는 전화가 하루에도 수 십 통씩 걸려와 이 사건에 대한 일반국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큰가를 짐작할 수 있어요.
―「분노」라는 표현이 더 적절합니다.
―대검중수부가 수사 주체가 돼 서울지검 특수부 검사 전원과 남부지청·인천지검·대구지검·울산지청에서까지 지원 됐고 그 동안 소환된 사람만도 2백여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인력으로 새마을과 전씨가 저질러온 숱한 비리들을 얼마나 깊고 광범위하게 파헤쳐 내느냐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지난 23일 새벽 황흥식씨가 숨겨 두었던 비밀장부를 찾아낸 것은 현재까지 진행된 수사과정 중 최대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비밀장부에서 공금유용 등의 결정적 단서를 풀게 됐으니까요.
―29일 전씨의 출두와 함께 황씨 등 두 동서가 한꺼번에 구속되자 항간에는 『사위 셋이 동시에 철창 신세를 지게됐으니 전씨 처가는 묘 자리를 잘못 쓴 모양』이라는 우스갯소리와 동정론이 일더군요.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가 주목됩니다. 외국언론의 시각과는 반대로 국내에서 야당은 『제 5 공화국 비리를 유야무야 얼버무리려는 의도』라는 비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검찰수사가 국민 기대에 못 미칠 경우 결국 국민들의 의혹을 일부만 풀어준 채 넘어가는 셈이 되고 말겠지요.
―이번 사건은 전씨 새마을의 행태에 비춰 처음부터 예견했던 것이지만 「권력무상」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이 없겠죠. 다시는 권력을 등에 업은 무모한 비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정리=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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