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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짬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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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저돌적이라는 뜻의 속어인 '무데뽀'는 일본어 '無鐵砲'가 원발음 그대로 들어온 말이다. 전쟁터에 총도 없이 막무가내로 뛰어든다는 뜻이다. 이처럼 슬그머니 우리말처럼 돼 버린 일본어는 수두룩하다. '짬뽕'도 그중 하나다.

일본 나가사키의 '시카이로(四海樓)'는 5층 건물 전체가 중국집이다. 1층에는 짬뽕 박물관이 있고 5층에는 짬뽕만 판다. 1899년 이곳에 중국집을 차린 친헤이준(陳平順)이 짬뽕을 처음 만든 인물이다. 당시 인구 6만의 나가사키에는 가난한 화교와 중국 유학생이 1만 명을 넘었다. 중국 푸젠(福建)성에서 맨몸으로 건너온 그는 배곯는 유학생들을 위해 푸짐하면서도 값싸고 영양 만점인 요리가 없을까 고민했다. 궁리 끝에 쓸모없는 돼지뼈와 닭뼈를 서너 시간 푹 고아 하얀 국물을 내고 쫄깃한 면을 삶아 넣었다. 여기에다 나가사키 앞바다에 풍부한 새우.오징어.굴, 어묵과 다듬다 남은 양배추.파.숙주나물을 살짝 기름에 볶아 듬뿍 얹었다. 이것이 바로 짬뽕이다. 짬뽕의 시원한 맛은 화교는 물론 일본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았다.

지금 시카이로의 젊은 사장인 친마사즈쿠(陳優繼)는 헤이준의 4대 종손이다. "짬뽕은 중국어로 밥 먹었느냐(吃飯)의 푸젠성 사투리인 차폰(chapon)에서 유래됐습니다." 차이나와 닛폰이 뒤섞인 발음이 아니냐는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한 일본학자가 그렇게 잘못 주장했지요. 상관없어요. 짬뽕은 처음부터 열린 요리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짬뽕은 계절에 따라 죽순 등 제철 재료를 조금씩 달리 넣는 사계절 요리다. 한국에선 얼큰한 맛을 내기 위해 고춧가루를 넣어 국물이 빨갛다고 하자 크게 웃었다. "짬뽕이 사랑만 받는다면 아무래도 괜찮아요. 헤이준 할아버지도 그런 생각에서 짬뽕 특허를 내자는 가족들을 야단쳤어요."

짬뽕 발상지에서 200m쯤 올라가는 산 중턱에는 토머스 글로버를 기리는 공원이 있다.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개항 직후 나가사키로 건너온 인물이다. 사카모토 류마(坂本龍馬) 등 개혁파를 지원하고 신문물과 과학기술을 소개한 근대 일본의 숨은 대부다. 그는 지금도 나가사키 국제 묘지에 묻혀 있다.

나가사키는 원자폭탄이 떨어진 비운의 도시. 원폭 낙하 중심지에 세워진 평화공원은 군국주의 일본의 비참한 종말을 증언하고 있다. 반면 짬뽕과 글로버 공원은 '열린 일본'의 상징이다. 한.일 관계가 껄끄러운 요즘 수학여행 길에 나가사키를 찾는 일본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