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물질적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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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적 남자'(황지우 작.윤정섭 연출)라는 낯선 제목은 무슨 뜻일까? 작가 황지우는 왜 이 연극을 '몸'에 관한 연극이라고 했을까? 왜 인형이 나올까? 무대미술가 출신의 윤정섭이 연출에 뛰어든 의미는 무엇일까? 아쉽게도 이 공연은 이런 질문들에 대해 기대한 만큼의 답을 주지는 못한다.

연극은 백화점 붕괴를 연상시키는 엄청난 굉음과 어둠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흙더미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정교한 등신대의 인형으로 형상화된 '나'가 누워 있고 화자인 또 하나의 '나'가 일심동체처럼 인형을 움직이며 극을 끌어간다.

잔해 속에 누운 중년의 남자인 '나'는 떡갈나무잎에 떨어지던 빗방울 같은 바깥 세상의 감촉과, 자신을 얽매던 추레한 아내와, 원조교제하던 이웃집 여고생과의 섹스를 떠올린다. 그것은 주로 '몸'에 관한 기억들이다.

이 연극의 핵심은 인형이다. 몸과 물질성의 상징적 구현이기 때문이다. 이 공연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2000년의 연극 '11월'에서 역시 공사장 흙더미에 묻힌 '나'로 대체됐던 인형은 죽어가는 사람의 몸과 물질의 기억을 소름 돋을 정도의 역설로 표현해냈다. 관객은 딱딱한 인형에서 몸의 정욕과 생명과 아픔, 그리고 그의 삶 전체를 오히려 더 생생하게 느끼고 기억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는 그런 긴장이 없다. 인형의 움직임이 많고 설명적일 뿐 아니라 의미적으로도 화자-조종자(정신)와 인형(몸)이라는 싱거운 이분법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오늘의 '몸'은 여전히 '정신'의 천박한 부수물인가?

또 하나의 문제는 황지우의 서정적이며 관념적인 언어가 윤정섭의 물질적 무대와 행복하게 만났는가 하는 점이다. 윤정섭은 죽어가는 '나'의 과거의 시간들을 내장까지 진동시키는 음향과 모래 위에 동영상으로 투사하는 특수 조명 등으로 과격하게 물화하고 파편화하며 끌어낸다.

그러나 무대 한가운데서, 공연을 제압하려는 듯 화려한 시어로 펼쳐지는 '나'의 기억과 사유들은 막상 몸과 삶에 대한 신선한 성찰에는 못 미친다. 그것은 이미 우리에게 낯익은, 이기적인 한국 중년남자의 감상과 집착과 욕정의 흔적이다. 그 결과 '나'는 극의 마지막에서 인형(몸)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물질적 욕망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것이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이제 우리 모두의 집단무의식이자 원죄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무대 위에서 아우성치던 그 '몸'과 '물질'은 단지 그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동원된 것일까?

이 공연은 연극원 부설극단인 돌곶이의 두 번째 공연이다. 우수한 여건에서 전 문화계의 기대를 안고 출발하는 극단인 만큼, 더 당찬 다음 공연을 기대해본다.

김방옥(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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