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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주변 오만의 귀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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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5공화국을 통해 공개적으로 가장 많은 미움을 받은 인물은 아마 요즘 말썽의 초점이 되고 있는 전경환씨 일 것 같다. 서진 룸, 살롱의 살인사건이 있은 직후 미국을 방문했던 그는 뉴저지의 한 식당에서 교포 유지들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달걀세례를 받은 적이 있다. 달걀을 얻어맞으며 몸을 피하는 그의 모습은 교포신문을 통해서 교민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때 한국 정부의 권위주의 체제를 변명하는 일을 주임무로 삼고있던 한 외교관은 『문제가 있어 외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왜 공식 만찬을 마련해서 이런 창피를 자초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찼다. 그 당시 전씨에 관한 악성루머는 국내보다 몇 배씩 불려져 교민사회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전씨의 공개적 처신이 교포들의 감정을 의도적으로 자극하려는 것이라고 교포들 중에서도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내에서 그가 공개적으로 당한 곤경은 국회 내무위에 불려나가 새마을운동본부의 여러 의혹에 대해 답변하는 일에 그쳤다. 그러나 그 이후 표면에 감히 드러내 말하지 못한 이른바 「유비 통신」을 통해 그는 몰매를 맞았다. 최근의 한 보도에 따르면 그의 한 측근은 이렇게 불평했다고 한다.
『전(경환)회장이 하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편견을 갖고 보니 좋은 일도 나쁜 일이 된다. 해외연수만 해도 새마을운동본부가 시작하니까 예산낭비라고 두들겨 패더니 지금은 또 신문사에서 교사연수 등을 주관하고 문교부에서 한다고 하니까 마구들 잘하는 일이라고 칭찬하는데, 같은 연수도 전 회장이 주관하면 예산낭비고 문교부나 신문사가 주관하면 애국적인 행동인가?』
그와 같은 항변은 분명 잘못된 비유를 담고 있어서 이에 수긍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항변이 전제로 삼고 있는 전씨에 대한 비판적 여론의 열도는 그리 틀리지 않는 것 같다. 그는 분명히 여론의 미움을 사고있고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온갖 혐의는 사법적 조치에 앞서 정치문제로서의 무게를 갖고 있는 것이다.
「새마을 비리」라고 부드럽게 표현되고 있는 그의 행적은 앞으로 검찰의 조사를 통해 밝혀지겠지만 그 결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건 간에 그가 도맡아 상징하고 있는 「미움」의 원인은 새 정부가 극복하지 않을 수 없는 첫 정치적 도전으로 확대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새마을운동을 이끌어온 행태가 실정법을 어겼느냐, 어기지 않았느냐는 것은 2차적 문제가 되고 있다. 국민들이 느끼고 있는 분노는 최고 권력자의 실제인 그의 출세과정이 제5공화국의 출범 당시에 내세웠던 「사회정의」를 원초적으로 배신한 표본으로 비쳐지고 있는데서 비롯되고 있다. 그에 쏠리는 미움의 강도가 그에 대한 어떤 혐의보다 앞섰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제5공화국의 이른바 「개혁주도세력」들은 『국민들이 자기가 노력한 만큼 노력의 댓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래서 제5공화국 출범과정에 대해 회의를 품었던 사람들 중에서는 제3공화국이 표방했던 「조국근대화」의 억압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사회정의」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기대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80년 초의 민주화 열기는 바로 그런 기대 속에서 싹텄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장영자 사건, 명성사건을 대표로 하는 크고 작은 권력형 부정의 의혹으로 허물어져갔고 전경환씨의 어처구니없는 출세와 출세 후 그가 보인 탈법적·초법적 작태로 배신감을 싹트게 했던 것이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전씨의 이른바 「비리」는 하나의 대표적 상징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심판대에 오르고 있는 것은 새마을운동의 비리 하나가 아니라 제5공화국 아래서 저질러진 권력전횡의 온갖 작태와 그것으로 인해 누적되어온 배신감의 책임소재다. 전씨 개인에게 쏠리고 있는 「미움」도 그와 같은 개념화를 통해서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6·29선언에서 비롯된 민주화의 기대도 80년의 봄의 기대와 마찬가지로 절대권력의 부패가 척결될 수 있는 계기가 올 수 있겠다는 희망을 바탕으로한 것이었다. 민주화라는 추상명사보다는 그런 구체적 기대가 더 절박했을 것이다. 새 대통령이 이번 국회의원 공천과정에서 무리를 해가면서 인척들의 출마를 만류한 것은 이러한 여망을 인식한 결과라고 본다. 그런 모습에서 국민들은 다시 한번 권력 주변으로부터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의지를 읽으려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새 정부가 지금 당장 제기되고 있는 새마을비리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지켜보려 하고 있다. 과거의 청산 위에서 새 출발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흔히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말한다. 혁명은 기존의 권력체계가 허물어진 힘의 진공상태에서 새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정인데 비해 개혁은 구질서가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구 세력간의 몸싸움으로 변화를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기계를 망가뜨린 사람에게 기계수리를 맡기는 것과 같다는 비유로 개혁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어려운 개혁이 지금 우리 주변에서 시작되고 있고 새마을운동본부를 둘러싼 흑막을 벗기는 작업은 그 첫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앞으로 전개될 수사과정과 범법자들에 대한 처리과정에 있어서 국민은 방관자 아닌 당사자여야 된다. 다시는 권력주변의 오만한 무법적 작태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이 과정을 감시하고 개혁의 흐름 쪽으로 성원을 보내야 할 때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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