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과학칼럼

이제 과학은 선택일 수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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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과학계의 그런 요구는 이공계 대학으로 진학한 학생들의 심각한 학력 저하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이공계 교육에 꼭 필요한 물리.화학.생물을 충분히 배운 학생은 찾아보기 어렵다. 화학과에 진학한 뒤 화학을 처음 배우는 학생을 찾아내는 것이 훨씬 더 쉬운 형편이다. 고등학교에서의 과학 교육이 턱없이 낮은 수준인 것도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에서의 이공계 교육의 강도도 약화할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과학 교육의 부실은 학교 현장에서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새로 시작된 제7차 교육과정 자체가 그 원인이다. 창의력을 길러 준다는 명분으로 학습량을 크게 줄였고, 그 과정에서 과학이 배우기 어렵고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되어 버렸다. 결국 과목별 형평성 논리에 밀려 과학에 배정된 시간은 최소한의 과학 교육도 불가능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수업 시간이 너무 많이 줄어들어 물리.화학.생물.지구과학을 모두 배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돼 버렸다.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었다는 뜻이다. 탐구력과 창의력을 길러 준다는 새로운 목표도 오히려 과학을 더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경쟁할 수 있는 과학자를 양성하려면 대학의 이공계 교육은 강화돼야만 한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의 일부만을 배운 학생들은 대학에서의 강화된 교육을 소화할 수가 없다. 과학의 어느 분야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학제 간 융합이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최근 삼성에서 가산점을 주겠다고 밝힌 공학교육인증에서 학생들의 기초과학 전반에 대한 능력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인문사회학 분야로 진학하는 학생들에 대한 과학 교육은 아예 실종돼 버렸기 때문이다. 과학의 기본 과목 중 두개를 선택해 배우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 중의 절대 다수는 과학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못하게 돼 버렸다.

그런 학생들이 현대 사회에서 유능한 인재가 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사회의 민주화가 이루어진 오늘날 과학에 대한 인식 부족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된다. 과학과 관련된 복잡한 사회적 의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심각한 갈등과 낭비를 초래하게 했던 방폐장 건설이나 새만금 사업이 그런 경우다. 과학에 대한 최소한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맹목적으로 여론에 휩쓸릴 수밖에 없고,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물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감당해야 한다.

과학 교육은 획기적으로 강화돼야만 한다. 자연계열 학생들에게는 모든 과학 과목을 필수로 가르쳐야 하고, 그 수준도 높여야 한다. 인문계열의 과학 교육은 더욱 중요하다. 과학은 쉽고 재미있어 배우는 것이 아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꼭 필요하기 때문에 배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학기술 중심사회에서 과학은 결코 선택의 대상일 수가 없다.

이덕환 서강대 교수·화학 과학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