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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경제민족주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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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먼저 프랑스 정부는 자국 에너지 업체인 수에즈가 이탈리아의 동종 기업인 에넬에 인수되는 것을 막으려고 자국 가스업체인 가즈 드 프랑스와의 합병을 밀어붙이고 있다.

스페인 정부는 자국의 최대 전력 생산업체인 엔데사가 독일의 거대 에너지 기업인 에온에 인수되는 것을 막으려 애쓰고 있다.

그리고 미국에선 부시 행정부가 아랍에미리트 국영기업인 두바이 포트 월드(DPW)의 미국 내 6개 항구 운영권 인수를 허가한 데 대해 의회가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각국은 겉으론 에너지 전략이나 국가 안보를 구실로 내세운다. 하지만 적어도 프랑스와 스페인의 경우 진짜 이유는 경제민족주의에 있다.

도미니크 드빌팽 프랑스 총리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에너지의 전략적 중요성을 감안하면 가즈 드 프랑스와 수에즈의 합병이 가장 적절한 방안"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의중은 "외국 기업은 안 된다"는 데 있다.

논란이 된 미국의 6개 항구 운영권은 원래 영국 기업(P&O) 소유였기 때문에 '외국 기업의 인수가 안보를 위협할 수 있으니 견제해야 한다'는 여론은 논리에 맞지 않다. 그래서 의회 내 비판론자들은 9.11과 대테러 전쟁을 들먹이고 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이 중심이 된 반대론자들은 두바이 포트 월드가 아랍에미리트 정부 소유이고 세계무역센터를 폭파한 테러리스트 중 두 명이 그 나라 국민이란 점을 지적한다. 하지만 누가 운영하든 항구의 보안은 여전히 미국 정부의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다.

프랑스와 스페인 정부는 테러 대신 에너지 안보를 들먹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항구 운영권이 아랍 기업에 넘어가면 테러리스트의 잠입으로부터 미국을 무방비 상태로 내몬다는 논리보다 더 믿을 수 없는 주장이다.

유럽의 인수합병(M&A) 싸움에서 상대는 아랍국가가 아니라 독일과 이탈리아의 민간 기업들이다. 이들 국가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 단일한 상품.자본.노동 시장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어떻게 독일 기업인 에온이 프랑스 안보를 위협하겠나. 이탈리아가 스페인을 침략할까. 지금은 21세기이지 제1, 2차 세계대전의 전야가 아니다.

그들 논리대로라면 마치 17세기로 돌아간 것 같다. 당시 국왕들은 국력이 경제 자립과 경제에 대한 통제 극대화를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다. 무기 제조뿐 아니라 밀과 도자기 생산, 수입의 독점 등이 이런 전략에서 이뤄졌다.

이와 정반대 방향인 경쟁과 특화, 자유로운 무역과 투자로 가야만 번영과 성장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유럽 사람들이 알기까지는 그때부터 300년이 더 필요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시계 바늘을 17세기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외국의 자유로운 투자를 막고 자국 기간 산업을 키우고 있다. 이는 '신중상주의'일 뿐이다. 이웃끼리 경제민족주의로 보복하면 유럽 단일 시장이라는 꿈은 깨질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유럽 통합의 수호자인 EU 집행위원회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신보호주의에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신보호주의는 유럽 이념에 반하는 죄다.

부시 대통령이 내세울 수 있는 최선의 방어 논리는 아랍에미리트가 중동에서 미국의 최고 우방 중 하나라는 지정학적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요제프 요페 독일 디차이트 발행인

정리=장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