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담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담합의 뿌리는 깊고도 넓다. 기원전 3000년께 이집트 상인들이 서로 짜고 양털 가격을 올린 게 기록상으론 최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절 로마엔 담합이 극성을 부렸던 모양이다. 황제는 301년 최고가격령을 공표해 물건값을 일일이 법으로 정했다. '말 한 마리는 금화 1 아우레우스를 넘을 수 없다, 밀가루 한 포대는 최고 은화 10 아르겐테우스다'란 식으로. 상인들이 담합해 가격을 올리는 바람에 물가가 잡히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돈맛을 본 상인들은 황제의 법을 무시했고, 담합은 근절되지 않았다.

담합도 나라와 민족별로 다르다. 제일 엄격한 게 미국이다. 1890년 일찌감치 담합을 금지하는 셔먼법을 만들어 '독점금지법의 원조'가 됐다. 미국식 합리주의와 개척정신은 애초부터 담합과 거리가 멀다.

반면 어울리기 좋아하는 독일인은 담합에 관대했다. 앙드레 시드프리드는 "독일인은 패거리를 이루지 않고는 마음을 놓지 못한다"고 했다. 1897년엔 아예 법으로 '담합은 영업의 자유'라고 규정했다. 일본은 담합 천국으로 불렸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싫어하는 민족성이 한몫했다. 정부가 얼마나 담합에 관대했는지 나가세 가스히코는 '토끼도 알 수 있는 경제학'에서 일본 공정거래위원회를 '짖지 않는 개'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한국인의 담합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혈연.지연.학연이 곳곳에서 판을 친다. 별도의 '담합 유전자'가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1981년 공정거래법이 제정됐을 때의 일화다. 공정위로 신고가 쏟아졌는데 "옆 가게가 자기 혼자만 싼값에 판다"는 내용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담합 중에도 뿌리 깊은 게 밀가루 값 담합이다. 63년 밀가루.설탕.시멘트를 만들고 파는 19개 기업이 담합해 정부 고시가격의 5배가 넘는 폭리를 취했다. 일부는 정치자금으로 뿌려져 사회문제로 비화했다. 훗날 공정거래법 탄생의 계기가 된 이른바 삼분(三粉) 사건이다.

총리의 3.1절 골프회동 주선자로 모 제분사 회장이 거론된다. 이 회사는 다른 회사들과 짜고 6년간 밀가루 값을 올려 폭리를 취했다가 적발돼 최근 과징금 35억원을 부과받고 검찰에도 고발됐다. 이걸 무마해 보려고 회동을 주선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일찍이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담합을 일삼는 기업의 예로 제분업자를 꼽았다. 250년 전 영국 경제학자의 혜안이 오늘도 확인되고 있다. 대~한민국,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이정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