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누구에 내 목숨을 맡길 것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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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규모 9.0의 대지진이 발생했던 2011년 3월 11일 일본 도쿄 긴자.

직원 99% 구한 ‘모건스탠리의 기적’ #안전불감, 정부 아닌 우리가 뜯어고쳐야

중앙일보 도쿄총국이 입주해 있던 13층 건물도 많이 흔들렸다. 진도 5강(強).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안전교육 때마다 “우리 건물은 내진설계가 완벽하다. 진도 7에도 견딜 수 있다. 그러니 지진이 나도 결코 밖으로 나오지 말고 건물 내에서 대기하라”고 했던 안전관리 책임자는 가장 먼저 비상계단으로 줄행랑을 쳤다. 위기 시 인간의 공포는 본능적이다. 패닉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그 본능을 다스리는 것은 개인의 책임의식, 반복된 훈련 말고는 없다.

그걸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가 2001년 9·11 테러 당시 ‘모건스탠리의 기적’이다. 당시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면서 2973명이 사망했다. 역대 최악의 참사였다. 모건스탠리의 본사는 타워 2(나중에 무너진 건물)의 73층에 있었다. 당시 근무하던 직원 수 2700명. 주식투자 강좌에 온 고객 250명도 있었다. 먼저 바로 옆 타워 1이 공격당한 뒤 타워 2에는 당국으로부터 “일단 대기하라”는 지침이 떨어졌다. 전기는 나가고 사무실은 아수라장이 됐다. 모든 직원이 패닉이 됐다. 이때 무전기와 확성기를 들고 앞으로 나선 인물이 있었다. 모건스탠리 안전관리자 릭 레스콜라. “자, 조용하시고 진정하세요. 평소 하던 대로 합시다.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당시 모건스탠리 직원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지난 8년간의 훈련이 떠올랐다”고 회상한다. 레스콜라는 1993년 미 무역센터 차량폭탄테러 사건 이후 “당국의 대응에 맡겨둬선 안 되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그러곤 자체 재난대응 체계를 만들고 3개월에 한 번씩 전 직원이 직접 대피훈련을 하도록 했다. 73층부터 44층까지 30개 층을 걸어 내려가는 훈련을 반복했다. 여러 개의 대피통로를 숙지하게 하고, 함께 이동할 팀을 정하고, 각 팀의 리더를 정한 다음 리더들에겐 별도 훈련을 추가로 시켰다. 계단과 통로 사이에서 만난 두 명씩 짝을 지어 내려가며 분초까지 계산하게 했다. 1분 1초에 수백만 달러를 거래하는 직원들로부터 원성도 샀다. 하지만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직원들은 평소 훈련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불과 20분 만에 직원 2700명 중 2687명이 대피에 성공했다. 고객 250명도 전원 살아남았다. 하지만 레스콜라는 일부 직원이 보이지 않자 다시 위층으로 향했다, 순간 타워 2는 붕괴했다. 사망자는 레스콜라를 포함, 불과 13명. 그는 건물 붕괴 전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여보 울지 말아요. 난 지금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켜야 해요.”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현장엔 레스콜라가 없었다. 아니, 레스콜라는커녕 356개의 스프링클러는 먹통이었고, 비상구가 있어야 할 곳엔 수납 창고가 있었고, 소방 사다리차가 있어야 할 곳엔 불법주차 차량이 있었다. 기본의 붕괴다. 솔직히 이곳뿐이겠는가. 우리 사회 곳곳의 안전불감증을 단기간에 정상화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그들’이 나서서 고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 스스로 고쳐나가는 수밖에 없다. 목욕탕이나 노래방을 가면 먼저 비상구를 찾자. 비상계단도 확인하자. 입구가 막혀 있으면 주인에게 따지고 신고하자. 소화전 앞이나 비상도로에 주차해 있는 차를 보면 당장 견인 신고하자. 그래야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바뀐다. 레스콜라 같은 이들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 스스로 레스콜라가 되는 게 모든 것의 시작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