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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전문적으로, 그러나 가장 쉽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63호 32면

머리말을 읽는데 질문 하나가 눈에 꽉 꽂힌다. ‘그들이 뭘 듣는 것일까?’ 저자가 답변도 한다. ‘주로 음향을 듣는 것이 아닐까.’

『브람스 평전』 #저자: 이성일 #출판사: 풍월당 #가격: 4 만 5000원

그들이란 음악을 듣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니까 나도 포함된다. 문득 고개를 들고 생각해 본다. 나는 음반을 틀어놓고 무얼 듣는 것일까? 음향일까, 음악일까.

저자는 “작곡가에 대한 지식은 음악을 이해하는 연결고리가 되어 작곡가와의 정신적 교감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특히 브람스는 이것이 없으면 긴 음악을 들어내기 어렵고, 음악을 들어도 진정한 기쁨을 얻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브람스 음악은 쾌감을 주는 음향도 별로 없는 만큼, 작곡가를 모르면 음악은 지루한 소음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 이성일은 2001년에 브람스 평전을 펴냈다. 브람스의 삶을 상징하는 F.A.E(Frei aber einsam, 자유롭지만 고독하다)를 제목으로 삼았다. 브람스에 대한 읽을거리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본격 연구서였다. 더구나 한국인에 의한 서양 작곡가 평전이었다. 책은 출간되자마자 큰 관심을 끌었으나 조기에 절판돼 책 값의 다섯 배에 거래되는 희귀본이 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전면 수정해 무려 752쪽에 이르는 대작을 세상에 내 놓았다. 스스로 ‘이 정도면 브람스를 이해하는 고급 비평서로 손색이 없다’고 자신한다.

새 책은 『브람스 평전』을 제목으로 내걸었다. 평전(評傳)이란 아무 책에나 붙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사람의 삶 전체를 세세히 기록할 뿐 아니라 논평(論評)까지 보태야 하기 때문이다. 논평을 하자면 연구가 넓고 깊어야 하며, 대상에 대해 무한한 애정까지 있어야 한다. 저자는 독일, 영국의 연구서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평생 수집한 그림과 사진자료를 활용했다.

책은 빠르게 읽힌다. 어느 페이지든 읽기 시작하면 푹 빠진다. 저자의 글 쓰는 모토가 ‘가장 전문적으로, 가장 쉽게’이기 때문이다. 소설적 상상력도 발휘된다. 처음 만난 클라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피아노를 치는 스무 살 브람스를 보자. ‘수줍음, 열정 등이 뒤범벅되어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지만, 온 몸의 열기를 손가락에 집중해 연주를 시작했다’.

42년 뒤 62세가 된 브람스와 76세의 클라라가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은 애달프다. ‘조용하긴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뜨겁고 깊은 정서가 흐르고 있었다. 클라라의 뺨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녀의 눈은 내면에서 어떤 빛이 나와서 환해진 것처럼 반짝였다’. 이 글은 슈만의 막내딸 오이게니의 『회고록』을 읽고 저자가 자신의 문체로 다듬은 것이다.

브람스와 클라라의 사랑에 대해 저자는 ‘고결한 정신주의’에 기초한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마음이 가장 잘 통하는 사람이고, 영원한 스승이며, 듬직한 비평가였다고 설명한다. 이런 결론은 ‘슈만 서클’의 성격을 찬찬히 연구해서 내린 것이다. 스승의 아내를 사랑한 브람스라는 다소 난감한 이미지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 나면 깨끗하게 사라진다.

나는 몇 년 전 바흐의 도시들을 순례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 기악 걸작들이 탄생한 쾨텐에서는 바흐의 근무처였던 레오폴드 성에 들렀는데, 바흐기념관 한 쪽 창가에 18세기 복장의 여인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인형이었다. 그것은 묻지 않아도 바흐의 아내였다. 대공을 모시고 멀리 칼스바트로 여행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는 마리아 바바라.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마리아는 세상을 떠났고 바흐는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을 담아 음악을 지었다. 바이올린과 쳄발로를 위한 소나타(BWV 1014~1019)가 그것이다. 1번이나 5번 소나타의 1악장을 들으면 바흐의 슬픔이 느껴져 나도 몰래 눈시울이 젖는다.

바흐와의 교감은 가족사를 알고, 현장에 가봤기에 가능하다. 『브람스 평전』을 덮은 지금 그의 음악은 다르게 들릴까. 지금까지 그의 관현악은 대체로 답답하고 억눌린 성적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느낌이었다. 턴테이블이 돌아가고 4번 교향곡 1악장이 흐른다. 브람스의 고향 함부르크의 차가운 겨울 안개가 나의 몸을 휘감는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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