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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성차별 과학계에 강펀치 날린 여성 과학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중앙일보·교보문고 선정 '2017 올해의 책 10' 

랩걸

랩걸

랩걸
호프 자런 지음
김희정 옮김
알마

[과학] 『랩걸』은 식물에 비추어 삶을 돌아보는 아름답고 유머러스한 책이다. 헐거워진 문장에 진저리를 치는 요즈음 이만큼 단단한 글을 만나는 건 드물지만 즐거운 일이다.

지은이 호프 자런은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에서 자랐다. 여름에 옥수수밭에 서 있으면 성장이 빠른 옥수수가 자라느라 껍질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식물이 자라는 소리와 아버지의 실험실에 드나들던 기억이 소녀를 과학자로 키웠다. 그렇다. 놀랍게도 저자는 과학 ‘작가’가 아니라 진짜 ‘과학자’다. 호프 자런은 ‘타임’이 선정한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풀브라이트상을 세 번 수상한 유일한 여성 과학자다.

이쯤 되면 『랩걸』이 과학자의 성공기인가 싶을 테다. 아니다. 실패를 거듭하는 분투기다. 특히 남성사회에서 여성 과학자가 어떻게 버텨내는가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다. 남성 과학자들에게 가려져 평가를 받지 못한 여성 과학자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호프 자런이 경력을 쌓아간 시절에는 대놓고 성과를 가로채지는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세상은 남자처럼 일하는 여자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남자의 영역에 들어온 여자를 불편해 하니까. 존스홉킨스대 재직 당시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자런은 자기가 만든 실험실 출입을 금지당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랩걸』이 본격 페미니스트 서적은 아니다. 한 그루의 나무가 성장하듯 한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매진해가는 이야기다.

인정받는 과학자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호기심, 재능, 수학적 능력, 그보다 필수적인 건 돈과 동료다. 자런처럼 실험실을 운영해야 하는 과학자는 실험장비와 인건비가 절대적이다. 돈이 있어야 연구를 할 수 있고, 학문적 업적도 이루고 교수 신분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필요한 비용은 모두 연구 프로젝트를 따서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아무도 그녀를 핵심 멤버로 인정해주지 않는 과학계에서 자런은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다. 다행이라면 그녀에게는 실험실을 맡아줄 든든한 동료 빌이 있다. 실험실을 지키기 위해 빌과 벌이는 좌충우돌은 상상 초월이지만 이 책의 유머 파트를 책임진다.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기억날 대목은 자런의 삶과 짝을 지어 들려주는 식물 이야기다. 연구실을 닫아야 할 최악의 상황에서 자런은 식물로 화제를 돌린다. “선인장은 사막이 좋아서 사막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막이 선인장을 아직 죽이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사는 것”이라며 자신의 처지를 선인장으로 은유한다.

2000년을 기다린 연꽃의 씨앗, 위기가 닥치면 돕는 버드나무 등 자런의 식물 이야기는 매혹적이다. 이 책은 과학자, 의사, 법률가 같은 전문가들이 읽으면 좋겠다. 열 사람이 읽고 말 논문이 어떻게 대중을 만날 수 있는지, 좋은 본보기다.

한미화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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