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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부르는 따스한 ‘겨울여행’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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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호 27면

[CLASSIC COLUMN] WITH 樂: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바리톤 정록기의 ‘겨울나그네’ 음반. 국내 음반사 AUDIOGUY에서 제작했다.

바리톤 정록기의 ‘겨울나그네’ 음반. 국내 음반사 AUDIOGUY에서 제작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양손에 옷가방을 들고 여관으로 향했다. 흔히 ‘달방’이라고 하는 월세방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대학도 졸업한 마당에 집에 손 벌리기는 싫었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시작한 부산은 낯선 땅이었기에 언제든 서울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방인으로 와서 이방인으로 가려면’ 생활은 가벼워야 했다. 그런데 그 생활은 애초 생각보다 길어져 거의 1년간 계속됐다.

그 해 겨울, 나는 심야 라디오 방송을 담당했다. 새벽 2시쯤 되어야 집, 아니 여관으로 돌아왔다. 처량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 했으나, 가끔 자기연민에 빠지는 날은 있었다. 백석의 글에 나오는 “살뜰한 부모며 동생과도 멀리 떨어져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유일한 친구는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이었다. 텅 빈 여관방에는 음악과 나뿐이었고, 호기심 많은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며 방 안을 기웃거렸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자주 들었다. 첫 곡 ‘안녕히’(Gute Nacht)의 8분음표 피아노 도입부만 들어도 주위는 눈 내리는 겨울 벌판으로 바뀐다. 피아노의 흰 건반이 눈 내린 하얀 숲이라면, 검은 건반은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이다. 반복되는 음형은 눈길을 뚜벅뚜벅 걸어간 사람의 규칙적인 보폭인 셈이다. ‘안녕히’는 ‘겨울나그네’의 시작과 끝이다. 가장 인기 있는 곡은 성문 앞 우물 앞에 서 있던 ‘보리수’이지만 말이다. 사랑에 실패한 청년의 비애와 좌절, 방황, 마침내 죽음에의 동경까지 이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곡이 ‘안녕히’다.

낭만주의의 상징어는 방랑과 죽음이었다. 그래서 ‘안녕히’는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세계와의 작별을 예감하기도 한다. 뒤에 나오는 곡들은 좀 더 직접적으로 길 위에서의 죽음을 말한다. ‘나는 가야한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길을’(20곡 이정표), ‘내 길이 나를 무덤으로 데려왔다’(21곡 여관)’, ‘나는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더 편하겠지’(23곡 환상의 태양) 등이 그렇다.

하지만 시종일관 어두운 것만은 아니다. ‘안녕히’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면은 의외의 조바꿈이다. ‘안녕히’는 단조로 시작하는데, 마지막 절 ‘너의 꿈을 방해하지 않으련다’에서 장조로 슬쩍 바뀐다. 얼음 위를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전조되는 부분에서 눈보라 먹구름 사이의 작은 등불을 보게 된다.

여관방에서 듣던 ‘겨울나그네’는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와 제럴드 무어의 유명한 음반이었다. 이후 테너나 메조소프라노가 노래한 음반들, 현악사중주나 기타로 반주한 음반들을 접해왔지만 역시 바리톤과 피아노 버전이 가장 와 닿는다.

최근 발견한 음반은 바리톤 정록기와 일본인 피아니스트 마나부 마츠카와가 연주한 것이다. 정록기의 미성이 인상적이다. 무겁고 짙은 그림자를 걷어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은근한 온기를 품고 있으면서 곡에 따라 넘실거리는 드라마틱한 표현력이 돋보인다. 겨울 벌판으로 나선 나그네의 발걸음에 병적인 자기연민의 그림자는 없다. 오히려 질풍노도의 젊은 날을 방황으로 보내고 화롯가에 앉아서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피아노 음색 역시 고드름처럼 맑고 깨끗하다. 미성과 결합하여 음반의 청신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음색의 조화였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녹음도 칭찬할 만하다. 소릿결과 양감이 모두 풍성하게 잘 살아있어 듣는 즐거움을 준다.

겨울이다. 낭만주의자처럼 내면으로 숨어들기에 좋은 계절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시선을 돌려보면 더 빛나는 계절이다. 눈 내린 벌판도 여럿이 함께 걸으면 덜 추울 테니 말이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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