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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매장 가는 길이 붐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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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전광판의 빨간 숫자가 1620000000에서 멈췄다. 박혜경 경매사가 낙찰을 알리는 방망이를 두드렸다. 16억 2000만 원.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 기록이다. 1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철화백자 한 점이 강남의 중형 아파트 한 채 값에 팔린 것이다.

지난달 23일 오후 서울 평창동 서울옥션하우스에서 열린 (주)서울옥션의 제100회 특별경매는 미술품이 이제 투자해볼 만한 품목임을 알리는 현장이었다.

이날 낙찰 총액은 83억 2000만 원에 낙찰률 78%. 경매에 참가했던 한 미술 애호가는 박수근의 드로잉 한 점이 2700만 원에 팔려나가자 "나도 박수근의 드로잉 10여 점을 갖고 있는데 이제는 들고 나올 때가 됐다"고 얼굴이 밝아졌다. 미술품 애호가의 시대는 가고 미술품 투자자의 시대가 왔다.

'경마장 가는 길'이 아니라 '경매장 가는 길'이 붐비고 있다. 미술품 경매가 돈이 된다는 소문에 기존 컬렉터뿐 아니라 신진 미술 애호가층이 경매장을 기웃거린다. 소비자만 달뜬 게 아니다. (주)서울옥션이 7년 독주해 온 국내 경매시장이 지난해 문을 연 K옥션으로 경쟁 체제에 돌입한 지 불과 몇 달. 한국 미술시장에는 경매사 창설 바람이 불고 있다. 부산에 기반을 둔 조형화랑이 교보생명과 손잡고 새 경매사를 준비 중이다. 서울 강남 지역의 화랑 몇 개는 따로 또 같이 경매회사를 낼 차비에 들어갔다. 왜 지금 미술품 경매인가.

김순흥 K옥션 대표는 "소비자의 반란"을 큰 이유로 꼽는다. 그동안 소비자를 무시했던 화랑이 해주지 못한 서비스를 경매사가 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작품 값 결정에 전혀 개입하지 못했던 일반인이 경매에서는 응찰이라는 형식으로 미술품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을 행사한다. 김 대표는 "그동안 작가 이름과 크기로 결정되던 비합리적 가격이 통한 까닭은 미술품의 공개 유통 구조인 경매가 없었기 때문에 생긴 병폐"라고 지적했다. 미술품을 원하는 소비자들끼리 경쟁해서 적절한 가격을 확정하는 경매는 부동산이나 주식투자와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이다.

미술품이 소장자의 취향을 반영하고 문화생활과 연결된다는 점도 소비자가 경매에 열광하는 한 이유다.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을 사서 일정 기간 즐긴 뒤 이익을 남기고 팔 수 있는 공식 통로가 경매다. 낮은 금리나 널뛰는 주식시장보다 안전하고 투자 가능성이 큰 미술시장의 내일을 내다보는 젊은 투자자도 있다.

국내 미술시장이 지금 경매 이야기로 시끄러운 또 다른 까닭은 기존 화랑에서 터져나온 비판론 때문이다. 서울옥션의 100회 경매 개최 이튿날인 24일 오후 서울 세종문화회관 소연회장. 전국 112개 화랑 연합체인 한국화랑협회의 새 회장으로 당선된 이현숙 국제갤러리 대표는 "대형화랑이 주도하는 우리나라 경매회사가 공정거래를 하지 않기에 한국미술시장이 왜곡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옥션의 기반이 가나아트갤러리, K옥션의 대주주가 갤러리현대인 만큼 두 메이저 화랑이 손을 쓰면 미술시장은 두 화랑의 독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최근 서울옥션이 발표한 미술 작가 가격 지수에서 가나아트갤러리 소속인 생존 화가 K씨가 가중치를 적용받아 낙찰가가 크게 뛴 점을 들었다.

미술품 진위 여부를 가리는 감정 문제도 국내 경매시장이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큰 산이다. 지난해 터졌던 '이중섭.박수근 위작 사건'에 서울옥션이 관련됐지만 1년이 된 지금까지 명확한 해명이 없는 상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경매는 이제 한국 미술시장을 끄는 동력이 됐다. 소비자가 믿고 거래할 만한 투명한 정보 공개에 한국 경매의 미래가 달려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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