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기 훈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임기를 열흘정도 남겨놓고 있는 현정부가 각종 훈장을 무더기로 수여하는가하면 국무회의에서 국무위원들이 스스로에게 훈장 수여를 의결해 물의를 빚고 있다.
공이 있는 사람을 표창하고 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유공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일이다. 또 정부가 임기를 마감하면서 공 있는 사람을 숙훈하는 것도 마무리 업무의 하나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훈장을 주는 기준이나 공식심사 등이 임기 말이라 하여 더 후해지거나 소홀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금년 들어 정부의 훈장 수여를 보면 마치 선심이나 쓰듯 양산하는 감을 주고 자기 훈장을 자기들이 심사해 결정하는 보기 드문 현상까지 보인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훈장을 받을 공적이 있는지 없는지를 스스로 판단할게 아니라 다음정부가 심의, 결정토록 하는 것이 순리다. 정부의 이 결정에 대해 야당이 이례적으로 비난성명까지 내고 여론의 비판을 의식한 정부관계자가 최종결정이 아니라고 해 취소될 가능성도 비췄다고 하니 이 무슨 망신인가.
이번 기회에 정부의 숙훈에 대한 관행 중 평소 느껴오던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고 개선을 촉구하고자 한다.
우선 훈장·포장·표창 등 각종 숙훈이 지나치게 대량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훈장은 개인과 그 가문의 큰 명예가 되는 것인데 너무 양산되다, 보면 훈장 자체의 값어치가 떨어진다. 이번에도 한꺼번에 90명의 숙훈을 결정했지만 수십명, 수백명씩을 한꺼번에 표창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래서 훈장을 받는 사람도 별로 대단치 않게 여기거나 심지어 일부에선 탐탁찮게 여기는 경향마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또 훈장이 흔하다 보니 훈장 받은 사람이 그 후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예를 들어 수출 유공자로 표창 받은 기업주가 얼마 후 도산하거나 반사회적 기업인으로 낙인찍힌 사례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이런 일은 변화가 빠른 사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일로 치고, 또 나라가 급속히 발전하다 보니 유공자도 많을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보다 엄격히 심사해서 훈장의 권위를 높였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훈장의 기준문제다. 공직자의 경우 대상자의 공적 크기에 따라 훈장이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대상자의 직급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다. 장관급의 경우는 으례 1등급인 청조근정훈장이, 차관급이면 2등급인 황조근정훈장이 거의 자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훈대상자의 공적 내용, 그 공적이 국가사회에 미친 효과의 정도 및 지위, 기타사항을 참작하여 결정한다」는 보훈법의 조문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일반인에 대해서도 공적내용보다는 그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훈격이 결정되는 일을 흔히 보아왔다.
그리고 고위공직자들에 대해서는 퇴임하면 자동적으로 훈장을 주고있는데 여기에도 석연찮은 점이 느껴진다. 별 말썽 없이 일정기간 재임한 고위공직자라면 으례 상당한 공로가 있을 법하고, 외국서도 이런 예가 많다고 하지만 같은 직급이라도 재임 중의 공적내용이 다 같을 수는 없을 것이고, 그 중에는 범상한 봉사로 실제 이렇다 할 공적이 없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훈장은 받는 사람과 그 주변은 물론 많은 사람이 흔쾌히 기뻐하고 축하해 주는 것이 돼야 한다. 이번 국무회의의 말썽을 계기로 삼아 숙훈에 대한 정부의 재검토와 개선책강구가 있기를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