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9·11 테러범 누명 쓴 아랍인에 처음으로 배상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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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미국 정부가 무고한 것으로 밝혀진 9.11테러 용의자에게 처음으로 배상을 결정했다. 테러에 연루된 혐의로 1년여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집트인 이하브 알마그라비(38)가 그 대상자다. 알마그라비의 변호인 알렉산더 레이너트는 지난달 28일 "전날 열린 브루클린 연방법원 재판에서 미 정부가 30만 달러(약 3억원)의 배상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알마그라비는 9.11 테러 당시 뉴욕의 한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초 영문도 모른 채 보안요원들에게 끌려가 브루클린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구치소에 수감됐다. 테러 연루 혐의라는 말만 들었다. 수갑이 채워진 상태에서 발길질을 당하고 주먹으로 맞아 피를 흘리기도 했다. 발가벗긴 채 수색받는 등 성적 학대도 당했다. 항문에 손전등을 삽입당하는 고문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2002년 8월 테러에 가담한 혐의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풀려나긴 했지만 2003년 신용카드 사기 혐의로 미국에서 추방됐다. 현재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알마그라비는 "몸이 아프고 빚에 쪼들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30만 달러 배상금에 합의했다"고 강조했다. 옥중 생활로 지병인 갑상선염이 악화해 며칠 안에 입원.수술해야 할 형편이라는 것이다.

알마그라비는 지난달 28일 아랍의 '이슬람 온라인' 인터넷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감옥에 있을 때 곧 풀려날 것이라고 항상 믿었다"며 "당장 뉴욕으로 달려가 나를 가두고 고문한 인간들과 대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미국에서 추방한 이유인 신용카드 사기 혐의도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랍 언론들은 이번 배상 판결로 미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9.11 테러 직후 불법 체포.구금을 겪은 피해자 수가 1000여 명을 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온라인'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도 승소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만 해도 미국 정부는 책임을 100% 인정하지 않았다. 2004년 8월 존 애슈크로프트 법무장관을 비롯한 미 연방 관리 10여 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한 이번 소송에서도 피고인 미 정부 측은 '특별한 상황'을 강조했다. 추가적인 테러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는 주장이다. 알마그라비가 겪은 옥중 고문에 대한 부분적인 책임만 인정해 30만 달러 배상에 합의했을 뿐이다.

하지만 알마그라비의 변호인 레이너트는 "그래도 미 정부가 처음으로 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한 것이 중요하다"며 "이를 시작으로 아부 그라이브와 관타나모에 수감됐던 외국인들에 대한 인권유린 사례가 다시 조명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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