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극비 ‘남·북·미 회동’이 성사됐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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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주 목·금요일 이틀간 영국 런던에서 대외비 미팅이 열렸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과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가 공동 개최한 행사였다. 한국 측 참석자는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 당초 참석자 리스트에는 북한 측 대표, 그리고 미국의 조셉 윤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북한 측이 막판 불참을 통보했다. 지난달 29일 화성-15형 탄도미사일 발사를 앞두고였다. 그러자 조셉 윤도 취소했다. 문정인 기획, 국정원 연출 ‘남·북·미 3자 비밀접촉’ 구상은 이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성사만 됐다면 북핵 문제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획기적 사건이 됐을 거다.

북한 도발, 미국 반짝 제재, 한국 관망 반복 #고리 끊을 ‘2018 액션 플랜’ 갖고 있나

북한은 왜 불참했을까. 불참 통보는 화성-15형 미사일 발사의 예고편이었다. 곧 미사일을 쏠 텐데 미리 이야기 나눠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에서다. 당분간 대화의 자리에 나서지 않겠다는, 혹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메시지다. 미국 또한 마찬가지. 이제 백악관까지 때릴 수 있게 된 사거리 1만3000㎞ 미사일이 등장했는데, 덜컥 북한과 무릎을 맞댈 순 없었을 게다. 그런 점에서 이번 화성-15형 발사는 ‘게임체인저’였다.

흔히 오바마 정권의 ‘전략적 인내’를 일컬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노 액션(No Action)’, 북한 도발 때마다 반짝 제재안을 쏟아내곤 마는 트럼프 정권을 ‘리액션(Reaction·반사적 대응)’이라 비유한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또한 오바마의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요약하면 ‘북한 액션, 미국 리액션, 한국 노 액션’이다.

청와대의 ‘문재인-트럼프’ 통화 후 발표가 대표적이다. “‘대기권 재진입, 종말단계 유도, 핵탄두 소형화’ 세 측면이 입증되지 않아 ICBM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은 미국 정부·의회·전문가들의 고개를 갸웃하게 했다. 한 백악관 출입기자는 “강도가 담을 넘어 뒤뜰로 들어왔는데 ‘아직 집 안으로는 안 들어왔으니 더 기다려 보자’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고 했다. 미 공군 ICBM 통제장교 출신 브루스 블레어 프린스턴대 교수에게 물으니 세 가지 기술을 습득했다, 못했다 논쟁은 의미가 없단다. “됐으면 된 거고, 안 됐어도 곧 될 것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무자극 전략’에 언제 한번 북한이 호응한 적이 있었던가. 노 액션은 북한의 액션만 불렀다. 미국과의 공조만 저해했다. 북한이 노리는 바다.

사실 더 신경 쓰이는 건 트럼프의 폭주 본능을 꾹꾹 눌러왔던 ‘MT(매티스 국방, 틸러슨 국무장관) 콤비’의 거취다. 지난주 불거진 틸러슨 경질설을 트럼프는 일단 부인했다. 하지만 풍전등화다. 매티스가 “틸러슨을 자르면 나도 그만둘 것”이라고 담판을 지어 간신히 넘어갔다는 게 정설이다. 대북 강경파 손에 국무장관 자리가 넘어가면 매티스 혼자 고립된다. 매티스까지 동반 퇴진하면 사실상 게임 끝이다. 뚜렷한 북한 비전이 없는 트럼프는 극단으로 치달을 공산이 크다. 어떻게든 그 전에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일각에선 김정은이 내년 신년사에 핵·미사일 모라토리엄(잠정 중단)을 선언할 것이란 ‘희망’을 제기한다. 최대의, 아니 최후의 국면 전환 기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일말의 가능성도 틸러슨이 남아줘야 가능하다. 매티스가 기를 쓰고 틸러슨을 주저앉힌 이유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플레이어 북한에 맞춰야 하는 슬픈 현실이다. 김정은의 ‘원맨 액션’에 휘둘린 2017년이 저물어간다. 힘의 균형을 바꿔놓을, 리액션·노 액션을 뛰어넘는 담대한 ‘2018 액션플랜’을 청와대는 과연 갖고 있는가.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