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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체호프가 폐결핵 앓으며 쓴 작품, 인생을 바라보는 깊고 서늘한 시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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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책으로 읽는 연극 -세 자매

세자매 표지

세자매 표지

세 자매
안톤 체호프 지음
홍기순 옮김, 범우

연출가 전훈이 다시 체호프의 ‘세 자매(아트씨어터 문, 12월 31일까지)’에 도전하였다. 관객이 삼십 명 남짓 앉을 수 있는 소극장 연극이지만 정교한 레이스처럼 공들여 만든 2시간 40분짜리 장막극이다.

예술도 예술가도 시류를 탄다. 한때 화려하게 조명을 받다가 사라지는 예술가들이 있고, 예술의 제1원칙이 독창성이건만 트렌드를 모방하는 작품들이 떼를 지어 쏟아져 나왔다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풍차를 향해 돌진하였던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신념과 미학을 고집하기도 하는 법이다. 이십 여 년째 끈기 있게 체호프의 작품을 정공법으로 공연하는 연출가 전훈도 그런 돈키호테 아닐까. 비록 출연진은 바뀌었지만 ‘세 자매’는 동아연극상을 수상하며 전훈의 체호프 시리즈 중 가장 주목받았던 작품이기도 하다.

연극 ‘세 자매’의 세 자매. 왼쪽부터 올가, 이리나, 마샤. [사진 애플시어터]

연극 ‘세 자매’의 세 자매. 왼쪽부터 올가, 이리나, 마샤. [사진 애플시어터]

작품은 제목이 알려주듯이 올가, 마샤, 이리나라는 개성이 다른 세 자매의 이야기다. 변방에 살고 있는 그들은 세상의 중심인 모스크바를 갈망하지만,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청춘의 꿈은 부조리하고 어리석은 일상에 치여 서서히 마모된다. 매번 느끼는 놀라움이지만 체호프는 그 과정을 우아하면서도 우스꽝스럽게, 냉정하지만 서정적으로 그려내면서 이질적인 정서와 결들을 한 작품 안에서 유연하게 녹여낸다. 특히 이 작품은 작가가 폐결핵으로 생명이 소진되어가던 과정에 쓴 후기 작품이라, 완숙하면서도 생을 보는 시선이 서늘하다.

초연 후 십여 년이 지나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은 전훈의 연출에서도 그런 서늘함이 읽힌다. 재기발랄하고 빛나던 과거보다 덜 화려하지만 정밀하고 은근해졌다. 손쉽게 관객을 사로잡는 연극적 과장 대신 먹고 마시고 떠들어대는 부드러운 흥청거림과 쓸쓸함이 일상을 그리듯 섬세한 동작선과 자연스러운 앙상블로 구축되었다. 덕분에 4막의 파국은 느닷없다는 인상을 주지만, 정치적으로 거친 시대를 살면서 불가피하게 거친 연극을 많이 지켜봐야 했던 터라 체호프의 복잡한 결을 레이스 뜨듯이 작은 디테일까지 공들여 만든 무대는, 아직 아름다운 연극이 가능하다는 깊은 안도감을 준다.

극장의 좌석이 특별하다. 체호프 전용관인 이 극장은 체호프의 긴 장막극을 관객이 집중해서 볼 수 있도록 객석 수를 줄이고 영화관처럼 편안한 좌석을 구비하였다. 제대로 된 지원금도, 홍보도 없이 과연 이런 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 얼떨떨하지만 그 돈키호테적 노력으로 관객은 무대의 밀도에 충분히 집중할 수 있다.

김명화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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