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제2부-8)우창항에 꽃핀 「조선통신사 유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동국대 일본중국-사국지방 학술기행>
다카마쓰(고송) 에서 출발한 정기 페리여객선은 우야에 한시간 채 못되어 닿았고 그곳에서 또 오카야마(강산) 로 연결되는 기차가 있었다. 이곳들은 사국과 중국지방을 연결하는 세트나이카이(뇌호내해) 에 면한 아름다운 항구들로서 예부터 대륙과 일본을 잇는 그들 부내문화의 창구이기도 했다.
고대농경사회에 있어서의 도작의 전래, 토기·우기·철기문화와 불교 및 한자의 전래 등 모두가 이곳을 통해 일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쇄국정책을 펴던 강호시대에 들어가서도 당시의 덕천막부는 조선과의 적극 외교를 퍼 12회에 걸친 조선통신사들의 왕래가 있었다. 이가운데서 왕복길 15회에 걸쳐 기행했다고 하는 우시마도(우창) 에는 지금도 그들 통신사가 남기고 간 문화유산들이 꽤 많이 남아있다.

<고려청자도 진열>
우창이란 곳은 부산에서 떠난 일행이 대마·길?·하관·상관·구예·병을 거쳐 강호에 이르는 중간기착지로서 강산시내에서 서대사쪽 블부하이웨이를 따라 한시간 쯤 가다가 읍구에서 바다쪽으로 빠지는 사잇길을 택하면 오카야마에서 불과 한시간 반이면 닿을 수 있는 한적한 해안도시였다. 이곳에는 우리 통신사 5백 명에 가까운 인원이 묵어간 명사터와 다옥, 접대소인 본련사, 그리고 비전번주가 응접했던 본련사 응접실에는 지금도 우리 나라의 서화·병풍·족자·고려청자 등 수십여 종의 유품들이 갈 보존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1643년(인조21년) 종사관 신유(호는 죽당)와 제술관 박안기가 남겨 놓은 세쪽의 묵적과 1655년(효종6년) 정사 조형, 부사 유양, 임수간 등, 그리고 1711년(숙종37년) 서기 남성중 등이 남기고 간 한시 족자 9폭이 작자·연대미상인 당인(그들은 한국인을 이 「당」자와 「한」자를 써서 「가라비토」라고 발음한다) 의 동양화 한 폭과 함께 사방 벽에 걸려 있으며 몇 폭은 두루마리로 고이 모셔져있었다. 그 때 받은 고려청자 또한 그들 진열장에 잘 정돈되어 있어 더욱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이곳 교육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미리 연락을 받은 사회교육과장「다카하시」(고교중부) 씨는 그 곳에 전통적으로 전한다는 가라코오도리(당자용?)의 전료양을 담은 필름을 그들 영사실에서 보여 주었다. 일년 중 연희시기는 매년 10월이 아니면 볼 수 없었기에 이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0월 중에서도 제4 일요일을 기해 이곳 곤노우라(감포) 의 야쿠진자(역신사)에서 가을 제례로 추어지는 일종의 소년들의 춤이기도 하다.
이는 1960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당자용보존회에서 발간된 『당자용』(1979년) 에 의하면 「이국풍의 조촐한 밝은 색채의 의상을 입은 두 남아가 무동을 타고 들어와 악대석의 북과 피리, 그리고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는데 의상과 노래와 춤의 동작도 다른데서 그 유례를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라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이 춤은 7, 8세의 동자 두 명이 어른들의 어깨 위에 무동을 타고 나오는데 이는 우리 민속춤과 농악 등에서 흔히 있는 일일뿐 아니라 춤이 시작되면 한발을 세우고 앉는 모습에서부터 절하는 모양, 그리고 그 복식과 모자하며 반주음악·가사 등이 한국의 전통무용과 다를 바 없다.
우선 복식 면에서 보면 흔히 조선시대 패군악(호적대)과 정장무에서 무인들이 입는 갑옷(앞으로 두 갈래로 터진 황금빛 찬란한 갑주) 에 목둘레에는 또 우리 나라 순조28년(1828년) 에 나온 『진작의궤』의 도록에서 볼 수 있은 무산번(춤의 이름) 의 금가자라는 턱받이가 , 바로 그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바지는 고말이라 하여 앞에 보인 『진작의궤』뿐 아니라 그보다 앞서나온 『독학궤범』『시갑무보』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은 우리 나라 전통바지 차림이었다. 모자 또한 우리 나라의 금화전립과 같다.

<3박자템포 그대로>
그리고 가사와 박자가 비슷하기는 가사 중 뜻 모를 「?」와 「?」 등은 우리말의 「오신다」와 「하신다」에 비슷하고 그 외에도 「?」「?」 등 우리말에 가까운 여운의 소리가 남아 있다.
노래의 마지막에 3박자의 경쾌한 템포는 또 우리 노래와 춤박자의 보편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 기원설도 첫째는 전설적인 인물, 신공황후에 관한 삼한기원설-이는 삼한을 정복하고 감포에 닿았을 때 포로로 데리고 온 동자가 나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제 나라의무용을 한 데서 비롯하였다는 설, 그곳에는 또 그가 앉아 쉬었다는 신공황후의 요괘암이 있다.
둘째, 조선통신사에 의한 기원설. 1986년에 나온 그곳 『조선통신사우창기행 350주년기념』이란 팸플릿에 보면 1643년 정사 윤순지와 종사관 신유가 파견되었을 때의 수행인원은 총4백62명이라 하였는데 그중 동자 19명이라 하였다.
그리고 우창에서는 삼사와 상상관외에는 모두 「정옥」이라 하는 일반 민가를 숙소로 제공하였다. 특히 1748년 홍계희를 정사로 삼았던 통신사일행 4백75명은 귀로에 폭풍우를 만나 18일간이나 이곳 우창에 머물렀다 하니 그때 이당자용은 추어졌으리라 추측되며, 한두 번이 아닌 여러 차례의 실연으로 그 곳에 남겨진 우리의 전통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째로, 가사를 짐짓 중국어로 새기는 중국기원설도 있으나 이는 믿기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통신사들에 의한 기원설로 특히 이곳은 강호왕복 때에 15회나 이곳에 들렀을 뿐 아니라 이 밖에도 강산현 곳곳에는 고고학적 여러 가지 출토품(석포정, 석부토기, 마패 등)과, 묘제를 알 수 있는 석관 및 고분묘(산양단지 사사고분군의상형석관을 비롯하여 천족고분 및 횡혈식석실), 우리의 산성을 닮은 옛 성터와 우원(총사시 흑미소재, 표고3백90m의 일명 「귀?성」과 강산시 초?부의 표고 2백m지점에 있는 산성) 등은 모두가 유독 이곳에만 집중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그것은 우리 동해안에 면한 그들 산음지방을 돌아보고 여기 또한 같은 생각을 갖기도 하였지만 어쨌든 이곳은 왕란의 흔적지로서도 참혹한 이야기와 그 실상을 보여주는 고장이기도 하였다.
7월31일 필자는 오카야마 한국교육원 최외식 원장의 안내로 향등의 백인담총을 찾아 나섰다. 일명 천인비총이라고도 부른다. 국도 2호선을 따라 히메지(희노)시쪽으로 24kmk지점에 이르면 비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다시 칠길 밑으로 약3백m 못 가서 한 등성이에 오르면 많은 전척비 옆에 일명 「천인비총」이라는 안내판이 나오고 고갯길을 올라서니 솔밭과 잡목사이로 천의 원혼이 숨쉬는 천비무덤이 있었다.
망연자실, 주위는 바람 한 점 없이 더웠다. 한쪽 옆엔 골기와로 이은 조그마한 사당하나 가 있는데 너무나 초라했고 그 앞에 지름4m, 높이1m 정도의 성토로 된 것이, 말하자면 그들이 우리 양민들의 코를 베어간 무덤이다. 경도에 있는 풍국신사 앞의 이총에 대해서는 주지의 사실이나 이곳에 또한 천인비총이 있다는 것은 별로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니시카와(서천굉)씨의 『강산과 조선』이라는 책자에 의하면 옛날 이곳 비전국재상으로 있던 자희다수가라는 자는 풍신수길에 중용되어 임진·정유 양란의 총대장으로 두 번에 걸쳐 15만∼16만 명의 대군으로 한번은 부산으로 상륙, 개성과 한성을 점령하고 두 번째는 남도의 많은 산성들을 공략, 이 때에 수천의 조선양민들의 코를 베어 소금과 우회에 절여 이곳에 반입하였다고 적고 있다.

<사당에 목찰모셔>
뿐만 아니라 앞의 우창항은 그 앞에 마에시마(전도)라고 하는 섬을 마주보고 있다. 그 전도와의 좁은 해협을 일명 「가라고토(당금) 의 나호」혹은 「당자의 뇌호」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당금의 나호」에서 좀 떨어진 우창의 작은 산등성이에는 그 예전에 「조선장대명신」이라 쓴 목찰 하나가 아주 초라하기 그지없는 작은 사당 안에 모셔져 있었다. 그것이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언젠가 또 시대를 달리하면서 지금은 집들이 밀집된 이동네(우창) 한가운데로 옮겨져 80노파인 아사바(천장) 할머니에 의해 그나마 이 사당이 지켜져 오고 있으며 매년 음력 9월15일마다 그 앞에서 간단한 제사가 치러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 「조선양대명신」은 그 곳의 루리히메(유리희)의 전설과도 부합되어있다.
『우창풍토물어』(1969년 예옥영창) 에 의하면 유리란 여인은 그 예전 삼한의 옥자 당금의 연인으로 왕자가 이곳 나호에서 전사하자 이를 알지 못한 그는 왕자를 찾아 배를 타고 도일, 우창 앞바다에 이르러서야 그의 전사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슬피 울며 이 바다 위를 표류할 때 이곳 촌장격인 한 사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이 사람은 남몰래 지금 「당금의 나호」라고 부르는 가까운 해변 언덕 위 숲 속에 굴을 파고 여인을 피신시켜 두고는 매일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그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여인은 입은 것(옷), 말하는 것 하며 보통 여인은 아니었으며 지체 높은 집안의 규수처럼 여겨졌다. 포구사람들이 잠드는 시간이면 매일 밤마다 해변에 나가 왕자를 생각하며 울곤 하였다. 그의 울음소리는 파도소리에 밀려갔으나 그간 점점 잦아드는 울음소리와 함께 그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 마침내 그녀는 쓸쓸히 죽어갔다. 촌장은 그녀의 사해를 그곳에 묻어 주고 작은 사당을 지어 유리희궁이라 이름하였다.
그런데 이 유리희궁과 그의 전설은 전기 「조선양대명신」사당과 그 사당 안에 보관된 「조선양유래기」와 거의 일치한다.

<전설여인이 현몽>
그 유래기는 세로 한자, 가로 두 자쯤 될까말까 하는 땟물과 빗물에 젖은 유지 위에 기록된 것이다. 유리희전설과 다른 것은 시대가 삼한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근세조선의 선조27년(1594년), 즉 그들 연호로는 「문록삼년갑오중추삼월」에 일어난 일이라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을 남긴 것은 바로 그 다음 해인 「문록사을미년구월」이고 그 말미에는 상기연호와 함께 「동원미우위문위 경구」라 적고 사인하고 있다.
여기 동원미우위문은 본래 우창인으로 일찍 항해술에 능하여 1592년(문녹원년) 왕란 때에도 전기 자희다수가를 따라 조선에 출전했고 경장이년(1597년) 에는 그 공으로 일정한 벼슬을 얻었으나 곧 사임하고 은거하였다고 한다. 지금 우창정교육위원회에 근무하고 있는 「히가시하라」(동원화랑)씨가 바로 이 사람의 직손으로 그날 그와는 직접 인연이 닿지 않았으나 호텔에 돌아와 그와 잠시 전화로 통화가 되었다.
동원씨는 그 댁에서 지금도 매년 조선양대명신에 대하여 제사를 주관한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몇 대조인지는 모르나 그 여인을 몰래 돌보았던 할아버지의 꿈에 여인이 현몽하여 그의 두터운 은혜를 고마워하고 앞으로도 자기를 신으로 모시면 영원히 자손번창하리란 것이었다. 그후부터 「조선양대명신」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10수대에 이르기까지 한 대에도 자손이 끊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삼한시대 당금의 만인이야기가 되었건, 혹은 왕란중에 있었던 당시 조선여인의 한 맺힌 원혼과 그 원귀가 되었건 간에 이 지방에는 선사이전우리의 전기한 많은 유물에서부터 중세·근세,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교역과 전설이 오갔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