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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만에 만난 몬트리올 레슬링 영웅, 양정모와 파벨 피니긴

중앙일보

입력

왼쪽부터 손갑도(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48kg 동메달), 파벨 피니긴(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8kg 금메달), 양정모(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 금메달), 마리야 피니기나(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1600m 계주 금메달) [파벨 피니긴 제공]

왼쪽부터 손갑도(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48kg 동메달), 파벨 피니긴(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8kg 금메달), 양정모(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 금메달), 마리야 피니기나(19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1600m 계주 금메달) [파벨 피니긴 제공]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영웅들이 41년 만에 한국에서 뭉쳤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금메달을 따낸 양정모(64·희망나무커뮤니티 이사장)와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의 영웅 파벨 피니긴(64)이다. 양정모는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에서, 피니긴은 자유형 68㎏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양정모와 피니긴은 21일 전남 나주에서 76년 올림픽 이후 처음 만났다.

그런데 둘을 연결시켜준 건 레슬링이 아닌 씨름이었다. 피니긴은 대한씨름협회의 초청으로 20~26일 나주에서 열리는 2017 천하장사씨름대축제에 야쿠티아 선수단을 이끌고 한국을 찾았다. 야쿠티아 선수들은 몽골, 스페인 선수들과 함께 세계특별장사전에 참가했다. 씨름협회는 씨름 세계화를 위해 2009년부터 세계특별장사전을 개최하고 있다. 야쿠티아는 러시아 내 21개 자치공화국 중 하나다. 한국인과 겉모습이 비슷한 투르크계 야쿠티아인이 50% 정도 차지한다.

피니긴은 한국에 도착해 천하장사대회 몽골 선수단 단장인 오정용 부산레슬링협회장에게 양정모와의 만남 주선을 요청했다. 오정용 회장은 양정모의 동아대 시절 스승이다. 피니긴은 "양정모와 체급은 달라 대결하진 않았지만 올림픽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눈 기억이 있다. 기술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선수였다. 동갑인데다 생김새도 비슷해 더 정이 갔다. 언젠가 꼭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기회가 찾아왔다"고 밝혔다.

왼쪽부터 손갑도-파벨 피니긴-오정용-양정모. [파벨 피니긴 제공]

왼쪽부터 손갑도-파벨 피니긴-오정용-양정모. [파벨 피니긴 제공]

부산에서 복지 사업을 벌이고 있는 양정모는 피니긴을 만나기 위해 약속 하루 전날 나주를 찾았다. 이틑 날 피니긴이 묶는 호텔에서 2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며 밀린 회포를 풀었다. 이 자리에는 84년 LA 올림픽 레슬링 48㎏ 동메달리스트 손갑도와 오정용 회장도 함께 했다. 양정모는 "피니긴이 한국까지 찾아와 날 만나고 싶어한다는데 망설일 수 없었다"고 밝혔다. 피니긴은 "나를 보기 위해 달려와줘 감동받았다. 41년 만에 만났지만, 친한 친구처럼 대화를 주고 받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했다.

정모와 피니긴의 만남에는 또 한 명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함께 했다. 피니긴의 부인 마리야 피니기나(59)는 88년 서울 올림픽 여자 육상 16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피니기나는 당시 소련팀 세 번째 주자로 나서 3분15초17의 세계신기록 달성을 이끌었다. 이 기록은 29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피니기나는 "서울 올림픽 당시 관중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함성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며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돌아봤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부부는 전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피니긴 부부는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가진 합숙훈련 때 처음 만났다. 올림픽이 끝난 뒤 곧바로 결혼해 아들 셋을 두고 있다.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의 파벨 피니긴-마리야 피니기나 부부. [대한씨름협회제공]

러시아 야쿠티아공화국의 파벨 피니긴-마리야 피니기나 부부. [대한씨름협회제공]

야쿠티아에서 둘은 '국민 부부'로 통한다. 둘의 이름을 딴 레슬링과 육상 전국대회가 매년 열린다. 동상도 세워져 있다. 피니기나는 "우리 아이들은 더 뛰어난 운동선수가 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가 겪은 힘든 과정을 아이들에게 물려주기 싫었다"고 했다. 피니긴은 "그래도 손자나 증손자 중에서 우리의 운동 유전자를 물려받은 아이가 한 명은 나올 것 같다"며 웃었다.

22일 씨름 천하장사대회가 열린 나주에서는 평창 겨울올림픽 성화봉송이 진행됐다. 피니긴 부부는 2014년 소치올림픽 때 성화봉송 주자로 나선 경험이 있다. 피니긴은 "양정모도 평창올림픽 성화봉송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평창올림픽이 반드시 성공하길 바란다"며 "우리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몇 년간 올림픽만 바라보고 땀흘린 선수들이 감동과 보람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다.

피니긴은 야쿠티아 체육장관을 거쳐,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야쿠티아에서 가장 큰 체육시설인 트라이엄프 체육관 대표도 맡고 있다. 피니긴은 "한국의 전통종목 씨름과 야쿠티아 합사가이의 정기교류를 위해 씨름협회, 용인대 등과 협의하고 있다"며 "내년 3월 내 이름을 딴 레슬링 대회에 양정모를 초청할 계획도 있다. 야쿠티아에 레슬링 영웅 양정모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고 했다.

나주=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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