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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12년 재임 중 최대 위기 … “차라리 재선거” 배수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포스트(Post) 메르켈 시대가 시작됐다.”

‘자메이카 연정’ 협상 불발 후폭풍 #메르켈, 소수 정부 구성에 회의적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협상에 기대 #메르켈 퇴장 땐 “독일판 브렉시트”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서방 자유 진영의 대표로 자리매김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벼랑 끝에 몰렸다.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한 9월 총선 이후 두 달이 지났는데도 연립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면서다.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은 그동안 친기업 성향의 자유민주당, 좌파 성향의 녹색당과 연정 구성을 위한 협상을 벌여왔다. 이 조합은 기독·기사연합과 자민당, 녹색당의 상징색이 검정, 노랑, 녹색으로 자메이카 국기와 비슷해 ‘자메이카 연정’으로 불렸다. ‘무티(Mutti, 독일어로 엄마)’ 메르켈로선 12년 재임 중 최대의 정치적 위기다.

사실 애초부터 자메이카 연정은 정치공학자들의 희망사항이었는지 모른다. 메르켈이 끌어안아야 하는 자민당과 녹색당은 각각 보수와 진보를 대변해 거리가 너무 멀었다. 두 당은 난민정책과 석탄발전 정책 등에서 사사건건 대립했다. 자민당이 난민 규모 제한을 주장하면 녹색당은 해외 거주 중인 난민 가족들의 입국 허용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자민당 대표 크리스티안 린트너가 “연정 협상에 참여한 4개 정당이 국가 현대화에 대한 비전이나 신뢰를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협상장을 박차고 나간 이유다.

메르켈은 정치 9단다운 배수진을 치고 정면승부를 택했다. 녹색당과의 소수 정부 구성안을 걷어찬 것이다. 그는 20일(현지시간) 공영방송 ARD에 출연해 “차라리 새로 선거를 치르는 게 낫다”고 말했다.

재선거 실시 여부는 구원투수로 나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의 연정 협상 결과에 따라 결정될 전망이다. 독일 일간 쥐트도이체차이퉁(SZ)은 “슈타인마이어의 시간이 왔다”며 초유의 헌정 위기를 풀 핵심 플레이어로 그를 주목했다.

메르켈 총리가 또다시 난관을 이겨내고 돌파구를 찾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ARD의 여론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57%가 연정 협상 실패를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메르켈이 다시 총리직을 맡는 데 대해선 58%가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베를린자유대 크리스티안 페스탈로자 교수는 “메르켈보다 더 경험이 많고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할 수 있는 정치인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재선거가 답답한 독일 정치 상황을 타개할지도 미지수다.

21일 현재 각 언론이 홈페이지에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재선거를 하더라도 정당지지도가 지난 9월 총선과 확연히 달라질 가능성은 낮았다. 게다가 일간 디벨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기민·기사 연합 지지자들은 대연정(31.8%)을 재선거(26.2%)보다 선호하는 반면 사민당 지지자들은 재선거(40.4%)를 대연정(18.2%)보다 훨씬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재선거에서 오히려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더 약진하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도 독일 정치권이 우려하는 대목이다.

메르켈의 퇴장은 EU를 비롯해 세계 질서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예컨대 독일에 난민 문제에 소극적인 후임 정부가 들어설 경우 난민대책을 둘러싸고 유럽이 일대 분열에 빠질 것이라고 파이낸셜타임스(FT)는 경고했다.

현지 언론들은 메르켈의 퇴장은 ‘독일판 브렉시트’ ‘독일판 트럼프의 당선’에 해당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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