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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잉, 딸 쑤윈 만난 지 12일째 옌안 떠나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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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55>

신4군 설립 초기, 당 서기 샹잉(앞줄 오른쪽 둘째)과 부서기 천이(앞줄 오른쪽 셋째). 앞줄 왼쪽 둘째는 1950년대 말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을 지휘한 예페이(葉飛). [사진 김명호 제공]

신4군 설립 초기, 당 서기 샹잉(앞줄 오른쪽 둘째)과 부서기 천이(앞줄 오른쪽 셋째). 앞줄 왼쪽 둘째는 1950년대 말 진먼다오(金門島) 포격을 지휘한 예페이(葉飛). [사진 김명호 제공]

샹잉(項英·항영)은 수즙음을 잘 탔다. 말로만 듣던 딸 쑤윈(蘇雲·소운)과의 첫 만남도 어색했다. 밤잠을 설쳤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학교로 갔다. 쑤윈이 싫어할까 봐 경호원들도 대동하지 않았다.

그 이후 샹잉 부녀 다시는 못 만나 #열네 살 돼 아버지 암살 알아 #소련 유학 간 쑤윈, 린한슝과 결혼

쑤윈의 구술을 소개한다. “아빠가 나를 데리러 학교로 왔다. 내 손 잡고 보육원으로 갔다. 보육원에 내 동생이 있었다. 내게 남동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보다 몇 개월 먼저 옌안(延安)에 왔다는 말을 듣고 더 놀랐다. 동생은 3살이었다. 나보다 4살 어렸다. 날이 저물자 동생은 보육원에서 돌봐 주던 보모를 찾았다. 어찌나 보채는지 아빠는 쩔쩔맸다. 결국 보육원으로 돌려보냈다.”

천하의 샹잉도 딸 앞에서는 다른 아빠들과 매한가지였다. 낮에는 회의와 일로 분주했다. 해가 지면 딸 데리러 학교로 갔다. 날 밝으면 다시 학교까지 데려다 줬다. 틈나면 발도 씻겨 주고 빨래도 했다. 쑤윈을 옌안까지 데리고 온 선생에게 저녁 대접하며 술도 직접 따라 줬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경호원들에겐 좋은 구경거리였다. 하루하루가 옌안의 화젯거리 되기에 충분했다.

조지 하템이 찍은 샹잉 일가. 왼쪽이 쑤윈. 1938년 9월, 옌안. [사진 김명호 제공]

조지 하템이 찍은 샹잉 일가. 왼쪽이 쑤윈. 1938년 9월, 옌안. [사진 김명호 제공]

마하이더(馬海德·마해덕)라는 중국이름으로 더 알려진, 미국인 의사 조지 하템(George Hatem)은 중국 혁명가들의 오랜 친구였다. 샹잉과 자녀들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샹잉이 자녀 데리고 중앙 조직부에 나타났다는 말 듣자 사진기 들고 달려갔다. 쑤윈도 이날을 기억했다. “마하이더는 아버지와 우리 남매의 유일한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는 이 사진을 좋아했다. 마오 주석도 샹잉의 일생에 가장 찬란한 모습이라며 즐거워했다.”

샹잉은 가족사진을 여러 장 현상했다. 동지들에게 나눠 줬다. 반응이 한결같았다. “샹잉도 웃을 줄 아는구나.” 쑤윈은 1950년대 말,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집에서 사진을 발견했다. “저우언라이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등영초)가 내게 줬다. 내가 훌쩍거리자 같이 훌쩍거렸다.”

11일째 되는 날 밤, 샹잉은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호원이 쑤윈을 불렀다. “네 아빠는 급한 일이 생겨서 내일 옌안을 떠난다. 내일 아침 너 보러 학교에 가신다니 그리 알아라.” 다음날 일본 항공기가 옌안을 공습했다. 산으로 피한 쑤윈은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신4군은 옌안과 연락이 빈번했다. 2주일 후, 옌안에 온 신사군 간부가 쑤윈을 찾았다. 샹잉이 보낸 보따리를 전했다. 편지와 과자 장갑이 들어 있었다. 하루는 신4군 교육 책임자 쉐무차오(薛暮橋·설모교)가 부인과 함께 학교를 방문했다. 쉐무차오는 자타가 인정하는 중국 경제학계의 태두였다.

쉐무차오의 부인은 쑤인의 생모를 아는 듯했다. 쑤윈을 만나자. “이런 딸이 있으니 샹잉 군장이 기뻐할  만도 하다. 네 엄마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다”며 눈물부터 흘렸다. 쑤윈이 우리 엄마 아느냐고 묻자 놀란 표정 지었다. 눈 언저리 쓱 훔치더니 그냥 가 버렸다.

중공 1차대회 기념관에 보관된 쑤윈의 생모 장량(오른쪽). [사진 김명호 제공]

중공 1차대회 기념관에 보관된 쑤윈의 생모 장량(오른쪽). [사진 김명호 제공]

중앙 조직부는 쑤윈의 생활과 교육을 남달리 챙겼다. 1세대 혁명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은 천윈(陳雲·진운)이나 리푸춘(李富春·이부춘)의 집에서 자고, 끼니는 주더(朱德·주덕)나 런비스(任弼時·임필시)의 부인이 직접 챙겨 줬다. 마오쩌둥도 쑤윈을 귀여워했다. 아무 때나 칫솔만 들고 오라며 갈 때마다 먹을 것을 싸 줬다.

쑤윈은 엄마 이름이 장량(張亮·장량)이라는 것도 옌안에 와서 처음 알았다. “아버지와 함께했던 12일 동안 엄마는 어디에 있느냐고 한 번 물은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네 엄마는 없다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는 어른들도 엄마에 대해서는 묵계가 있는 듯했다. 내가 엄마얘기 꺼내면 다들 얼버무리거나 자리를 피했다. 입이 싸기로 소문난 사람에게 네 엄마는 정말 예뻤다. 너보다 더 예뻤다는 말 들은 게 다였다.”

쑤윈은 열네 살 때 천이(陳毅·진의)를 통해 아버지가 4년 전에 암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용기와 희생의 시대였다. 주위에 부모 잃은 애들이 널려 있었다. 나는 그런가 보다 했다. 훗날 신중국 부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한 천이는 아버지의 오랜 동지였다. 아버지가 신4군 서기 시절 부서기를 지냈다. 너는 샹잉의 딸이라며 앞으로 샹쑤윈이라는 이름을 쓰라고 했다. 나는 시키는 대로 했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사람에게 나는 샹잉의 딸이라며 어깨를 폈다.”

1948년 중공 중앙은 국·공내전 승리를 확신했다. 혁명 열사와 당 고위층 자녀의 소련 유학을 결정했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전 신4군 군장 예팅(葉挺·엽정)의 두 아들과, 리쉬쉰(李碩勛·이석훈)의 아들 리펑(李鵬·이붕), 싼렌서점 설립자 쩌우타오펀(鄒韜奮·추도분)의 아들 쩌우저화(鄒家華·추가화), 가오강(高崗·고강)의 아들 등 21명을 선발했다. 샹잉의 딸 쑤윈과 장하호(張浩·장호)의 아들 린한슝(林漢雄·임한웅)이 빠질 리 없었다.

소련 유학 시절 쑤윈은 린한슝과 결혼했다. 유학생들 사이에 이런 말이 떠돌았다. “샹잉이 장하호와 린뱌오(林彪·임표)의 사돈이 됐다. 샹잉이 지하에서 바라던 일이 벌어졌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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