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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익시험 서른두 번 만에 1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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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한 고졸 직장인이 12년간 서른 두번의 도전 끝에 토익 1급을 따냈다. 삼성중공업에서 해양구조물 전기분야 설계를 맡고 있는 한상현(41.사진) 과장은 지난 1월 응시한 토익 시험에서 870점을 받았다. 대기업 입사를 지망하는 대학생들이라면 900점 이상이 흔한 마당에 뭐가 대단하냐는 시각도 있을 법 하다.

하지만 그 같은 현장 근로자에겐 의미가 남다르다. 배를 주문한 발주처나 현장의 요구에 맞추려 야간작업을 하다 보면 공부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경남 거제도 사업장 주변에 마땅히 다닐 만한 학원도 없었다.

한 과장이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은 1995년. 가정 형편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인천기계공고를 나온 뒤 입사한 그는 조선소에 파견된 선주 측 대리인이나 작업감독관들과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간단한 작업 지시도 알아듣지 못해 '아임 소리'를 거듭해야 했다. 영어 문서 하나 해독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특히 외국인 선주들과의 통화와 회의가 잦고 e-메일을 수시로 주고받아야 하는 상황이 곤혹스럽기 그지 없었다.

한 과장은 그 때부터 퇴근 뒤 밤 9시부터 두시간씩 토익 책과 씨름했다. 첫 시험에서 435점을 받았지만 실망하지 않고 공부를 계속해 4년 만에 730점(2급)을 넘어섰다.

독학만으로 점수를 높이기는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주변 학원을 알아봤지만 거리도 멀고 시간 맞추기도 힘들었다. 자신을 두렵게 만든 현장의 외국인들을 스승으로 삼기로 했다. 얼굴을 보면 먼저 말을 꺼내고 손짓발짓을 섞어 대화를 이어갔다. 친분이 쌓인 사람들은 집에 초대해 함께 저녁을 먹으며 영어를 배웠다. 이렇게 한 과장 집을 다녀간 외국인이 30여명에 이른다. 요즘엔 외국인 선주를 만나도 두세시간을 무리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수준이 됐다.

그는 "예전에 몇시간씩 쩔쩔매던 일을 간단한 전화 한통으로 처리해 업무 효율이 높아졌다"고 말했다.그는 외국인 선주들과의 회의를 잘 진행하는 실전 영어회의 매뉴얼을 만들어 직장 동료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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