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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국 출석사로 끌려간 고려범종|일본의 뿌리…한국문화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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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시고쿠(사국)로 가기 위하여 규슈 최대의 온천도시 벳푸(별부)에 도착하니 정오가 조금 지나 오후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온 시내가 유황냄새로 뒤덮여 있고 군데군데 용출하는 온천의 수증기가 굴뚝처럼 뿜어 나오고 있었다. 이곳은 유명한 관광휴양지이면서 규슈에서 시고쿠로 가는 길목이다.
다음날은 매우 쾌청했다. 상오 9시40분 벳푸항에서 페리를 타고 약 3시간만에 시고쿠의 야하다하마(팔번빈)에 도착했다. 이곳에서의 금산 출석사의 고려범종 조사를 위하여 바로 출발하려 했으나 이 절은 해발 8백m의 고지에 위치해있고 그곳에 이르는 버스는 상오 8시 1회뿐이었다.
난감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아래까지 가는 야지항 버스를 타고 해발 약4백m지점부터 차에서 내려 산길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출석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억류기 즉『책양녹』을 남긴 저 유명한 강항과도 인연이 있는 절이다. 그가 포로의 신세로 처음 억류된 곳은 야하다하마에서 보다 내륙인 오슈(대주)이지만 그의 오랜 억류 생활에서 자주 찾았던 사찰이 바로 이곳의 출석사란 점을 생각하면, 어떻게 하여 우리의 범종이 이곳 산상에까지 왔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길 없었다.
임진왜란을 전후하는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고대 문화재는 불교미술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의 야만적 약탈행위는 문화적 열등의식을 여지없이 발휘하였으니 곧 아름다운 사원의 방화와 함께 사찰 전래의 중요문화재에 대한탈취행위라 하겠다. 당시 약탈의 표적이 된 것은 주로 불상과 불화, 그리고 범종을 포함하여 이동이 용이한 공예품이었으며, 이 가운데서도 슈세키지(출석사)의 고려 범종 역시 임란 당시 그들의 약탈 품이란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범종조사는 한국인으로서 최초의 조사였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선봉이며 징검다리가 되었던 대마도를 비롯하여 규슈지방 깊숙이 내해를 연결하는 소위 세도나이카이(나호내해)는 곧 당시의 서울 오사카로 이어지는 해로상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더구나 이 해로 남쪽에 펼쳐진 소위 시고쿠의 에히메(애원)와 카가와 (향천)는 직접 그 같은 해로에 직결되는 지역이므로 우리 고대문화가 산재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짙은 곳으로 주목되었다.
산아래 마을 근처에는 동네가 온통 밀감 밭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이는 강항이 그의『간양록』에서 이미 기록한 바와 같이『하관을 지나 상관에 이르니 산수가 깨끗하고 물이 맑아 그림 같은 풍경이다. 따뜻한 고장이라 감귤이 치렁치렁 열려 햇빛에 번쩍이는구나. 도깨비 같은 놈들이 사는 고장으로는 아까운 정취다』고 한 것처럼 풍요로운 고장이었다. 그러나 4백여년전 이곳 낯선 고장에 끌려와 이국의 풍물을 글로 남겼던 강항의 심정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이 없지 않았다.
특히 강항은 그의『간양록』에서 이곳 출석사에 관계된 내용을 두 번 기록한 가운데 출석사의 왜승 호인에 관한 기록을 전해주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간양록』에 따르면 호인은 문장이 넉넉하고 또 억류생활의 강항을 가엾게 여겨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며 더구나 일본의 사적이나 지리·관제 등에 관계된 모든 문헌들을 보여주었는데 이때 강항은 이들 문서들을 모두 베껴서 남몰래 본국으로 보냈다.
짐을 지고 산길을 오르기란 여간 고되지 않았다. 약3시간이 걸려 천신만고 끝에 겨우 절에 도착했더니 하기 수련회에 참석한 2백여명의 남녀중학생이 입구의 일본 종을 치며 놀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종은 도무지 보이지 않아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주지승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여러 가지 설명을 듣고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 종의 유래에 대해서는 현주지 신산체인의 말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절 아래 대주의 성주「도도」(등당고호)가「도요토미」(풍신수길)의 휘하에서 조선출병을 했다가 가져왔다는 것이다. 즉 당시 출석사의 주지였던 쾌경이 전쟁에 나간「도도」의 무사귀국을 매양 기원해 주었으므로 그가 귀국하면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범종을 이곳에 헌납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간양록』에 등장된 호인이란 승려는 출석사의 주지명단 등에도 끝내 나타나지 않아 아쉬움을 지닌 채 날이 어두워 종의 조사는 다음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안개가 짙게 낀 산상의 절에서 우리의 범종 조사에 오전시간을 꼬박 보내야만 했다. 본당 앞의 입구에 높게 일본식으로 걸려있는 우리 종을 보는 순간 감격에 벅차 이제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듯 했다.
이미 종은 타종의 기능에서 벗어난 채 일본식으로 걸러 있는 것이 몹시 쓸쓸해 보였다. 국내의 어느 산사에는 불전 공양구로서 본래의 기능을 담당했던 이 범종이 하필이면 이곳 먼 이국 땅에서 일본식으로 달려있단 말인가.
신앙의 본고장을 떠나온 것도 서러운데 해풍이 몰아치는 이곳 낯선 신사에 외로이 걸려있음을 보니 반가움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면서 기구한 이 범종의 운명에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도 일종의 애국심일까.
종 아래 걸려있는 설명문은 간밤에 들은 주지승의 설명과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이에 따르면 소위 조선종이란 송대 이전 중국,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그중 28개가 왜구 침탈이나 임진왜란의 전리품으로 일본에 도래해 있으며 이 역시 그 가운데 하나로 종명이 마멸되어 작자나 연대는 불명이나 조각·음색 모두가 아름답고 빼어난 것으로 귀중한 미술품이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종의 명문은 본래 없고 문양 등은 분명했다. 그리고 설명문 역시 대주의 성주「도도」가 조선에서 가져와 출석사에 기증한 것이라 기록했다. 따라서 이 종은 약탈 품임을 그들의 설명과 구전에 의해 입증된 셈이다.
종의 높이는 연야, 아래지름이 56찌의 아담한 크기이며 상부의 용유에는 한 마리의 용을 등장시켜 우리 종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종의 어깨부분에는 고려시대의 꽃 문양을 바로 세우는 소위 입화양식의 수법이 등장되기 이전의 형태로서 이중의 연꽃 26엽을 편안하게 뉘어둔 도상학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동시에 상부미대에는 구름문양을 새겼으며 유곽에는 당초보상화문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그리고 그 내부 유두는 돌기되어 국내의 상원사 동종과 같은 신라양식을 추종하고 있다. 그러나 돌기된 유두는 상부 용두의 꼬리 쪽에서 2개가 절단되었고 나머지는 완존하였다. 이는 운반 당시 파손된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이 역시 안동에서 옮겨진 상원사 동종의 파손상태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연꽃모양을 둥글게 나타낸 당좌사이에는 양쪽에 보살상과 비천상을 나타냈는데 이들은 중앙의 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공양하는 비천상의 모습을 아름답게 나타냈다.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의 형태는 전형적인 신라와당의 형태와 동일하다.
하대문양 역시 상대와 마찬가지로 당초보상화문의 문양대를 아름답게 나타냈고, 종의 측면이 되는 유곽 아래의 종신 부분에는 21㎝×17㎝ 크기의 별도 문양대를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아마 이곳에 범종 제작에 따른 명문을 새겨 넣을 계획이었으나 생략된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우리 종의 특색인 음통(높이 14㎝)이 파손되어 이에 대한 수리가 확인되었으며 이는 일본에 건너온 이후의 사실로 추정되었다.
범종의 전체적 양식은 한국 종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고 우리 공예사에 있어서 주목되어야 할 견실한 작품임이 분명하다.
임란 당시 조선 억류민의 근거지였던 시고쿠는 곧 대륙문화 전수의 경로이며 이곳에 산재한 우리 고대문학에 대한 조사는 시간을 두고 이룩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보았다. 특히 이번에 조사된 출석사의 범종은 신나양식의 전통 위에 제작된 고려 초기의 종으로서 국내에서는 대흥사에 소강 된 탑산사 범종양식의 선구가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판단되었다.
앞으로「도도」의 조선 정벌 경로를 밝혀 이 종의 본래 소장 처를 해명하는 것도 큰 과제라 할 것이며, 임란의 수모는 사람만이 당한 것이 아니라 우리 고대 문화재 역시 약탈과 노략질 속에 아직까지 그 상처를 아물리지 못하고있다는 생각이다. 이 종이 하루속히 본 고장을 찾아 한국식으로 현가되어 우리 식으로 타종되는 그 날이 와야 출석사 고려범종 조사의 본 뜻을 회복하리라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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