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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야’ ‘사랑해’…‘징역 12년’ 미성년자 강간죄를 무죄로 만든 편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편지에 따르면 피해자는 피고인을 처음 봤을 때 귀엽다고 생각했으며, 피고인의 차를 타고 한강 고수부지에 갔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고, 그날 이후 피고인을 쭉 사랑해 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무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낸 대법원 판결 중)

1·2심 "마음에 없는 내용 적은 것" #대법원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 #징역 12년→9년→무죄로 확정

“그런 편지를 적지 않으면 피고인이 크게 화를 냈기 때문에 피해자는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나 드라마 대사, 노래 가사 등을 참고해 마음에도 없는 내용을 적었을 뿐이다. 설령 피고인에게 연민‧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이는 저항할 수 없는 특수한 상황에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종종 갖는 것으로 알려진 긍정적 감정에 불과하다.”(징역 12년을 선고한 1심 판결 중)

자신보다 27살 어린 여중생을 강간한 죄로 1‧2심에서 징역 12년과 9년형을 선고받았던 조모(48)씨에게 대법원 2부(주심 조희대 대법관)가 9일 무죄를 확정했다.

판결이 극적으로 달라진 것은 같은 증거를 두고 각 법원이 다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피해자 A양(사건 당시 15세)이 조씨에게 보낸 편지와 모바일 메신저인 카카오톡을 근거로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다고 봤다.

조씨 사건을 다룬 SBS '궁금한 이야기' 방송 화면. [SBS 화면캡쳐]

조씨 사건을 다룬 SBS '궁금한 이야기' 방송 화면. [SBS 화면캡쳐]

‘솔직히 저 오빠한테 차 탔을 때 반했어요. 아무한테도 뛰지 않던 심장이 오빠 옆에 있으니까 막 뛰더라고요.’‘처음이니까 경계하곤 했었는데 그래도 16년 만에 뛴 심장인데, 첫사랑인데’‘오빠만 평생 영원히 사랑할 거예요.’‘오빠야 처음 만났을 때 모자 쓰고 7부 바지에 반팔 완전 귀여웠어요. 처음엔 경계했지만 갈수록 너무 좋아졌어요.’ 등의 내용이다.

대법원은 이를 “색색의 펜을 사용한 것은 물론 하트 표시 등 각종 기호를 그리고 스티커를 사용해 꾸미기도 한 점에 비추어 보면 그 내용은 피해자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봤다.

앞서 1‧2심 재판부가 징역 12년‧9년이라는 무거운 형을 선고한 것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편지 내용만으로 조씨의 주장대로 연인 관계였다고 믿을 수는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 A양은 조씨의 아이를 임신해 집을 나와 조씨의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조씨는 다른 사건으로 구속돼 있었고 A양은 거의 매일 접견을 가고 편지를 보냈다.

하트를 그려 편지를 쓴 이유에 대해 A양은 “조씨가 문자메시지마다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라고 했고, 답장을 바로 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편지를 안 쓰거나 용지를 가득 채우지 않거나 사랑한다는 내용을 쓰지 않으면 화를 낼까 봐 허위로 썼다”고 진술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김씨 사건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순응하는 '순응 신드롬'이라고 봤다. 이 방송을 통해 피해자A양의 가명을 따 '은별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SBS 화면캡쳐]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김씨 사건을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순응하는 '순응 신드롬'이라고 봤다. 이 방송을 통해 피해자A양의 가명을 따 '은별이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SBS 화면캡쳐]

1심 재판부는 “편지 내용만 보면 피해자가 적어도 피고인의 구속 이후로는 피고인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볼 여지가 있지 않은지 의심이 가기는 한다”면서도 피해자 말대로 억지로 썼을 가능성 또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아이를 임신해 부모에게 알리기 어려운 상황에서 평소 폭력적 언행을 하던 중년의 피고인을 마지못해 추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1‧2심 재판부는 조씨가 주장하는 ‘순수한 사랑’을 믿지 않았다. 조씨는 자신의 아들 병문안을 갔다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던 A양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뒤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명함을 줬고 이튿날 병실에서 A양에게 키스를 했다. 1‧2심 재판부가 ‘강간’, 상고심과 파기환송심 재판에서 ‘사랑’이라고 파악한 성관계가 벌어진 것은 첫 만남 후 열흘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조씨는 이듬해 2월까지 A양과 관계를 가졌고, 태블릿 PC로 유사성행위 장면을 영상 촬영하기도 했다.

2심 재판부는 “조씨는 두 번째 부인과 이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있던 상황에서 중학생이 관심 가질법한 이야기를 건네 경계심을 누그러뜨린 뒤 강간했고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자 피해자를 버릴 듯한 태도를 보여 절박한 피해자로 하여금 자신이 시키는 대로 부모에게 거짓말을 하고 가출을 하도록 유인했다”고 봤다.

1심 재판부는 “조씨는 A양을 간음하던 시기에도 길거리에서 초등학생‧중학생을 포함한 여성들에게 접근해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내 이성관계를 가지려고 시도했다”면서 “조씨의 자신의 행위가 사랑이었다고 주장하나 실은 일방적인 정욕의 해소 수단이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오히려 ‘사랑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는 A양의 주장을 믿기 어렵다고 봤다. A양은 신고를 해 자신이 강간 피해를 입은 사실이 알려지면 조씨에게 보복당하거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할 수 있고 엄마가 충격을 받아 쓰러질 것이 두려웠다고 진술했지만 대법원은 “피해자 스스로 겁을 먹었다는 이유만으로는 추행‧강간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조씨를 계속 만난 사실을 쉽게 설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피해자는 키스만 해도 임신이 되는 줄 알았기 때문에 임신중절 비용 등이 걱정돼 어쩔 수 없이 피고인을 따라다녔다고 주장하나 상위권의 학업 성적에다 성교육을 받은 중학교 3학년이 키스만으로 임신이 된다고 믿었다는 진술도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동영상 촬영에 대해서도 “신체 일부를 애무하는 장면을 캡쳐한 사진만으로는 그 영상이 A양의 의사에 반해 촬영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법원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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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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