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겨운 이웃사촌"|영호남이 따로없는 「화개」장터를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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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리산 끝줄기 형제봉등성이서부터 퍼져난 햇살이 산자락 갈피로 스며내리며 강안개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삐그덕, 삐그덕, 나룻배가 움직일 때마다 유리알같이 투명한 강물은 찰찰찰 뱃전에서 찰랑인다.
강건너 장터엔 벌써 장꾼들의 발걸음이 부산스럽다.
부릉, 부릉, 강변으로 난 아스팔트길 위쪽 전남 구례땅에서 장꾼들을 싣고 온 버스가 장터안쪽 정류장으로 꺾어들자 아래쪽 하동서 올라오는 버스가 화개천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머리를 틀며 빠앙- 경적을 울린다.
『영감님, 일찍 나와겠소. 오늘이 옛날로 치면 섣달 대목장인디 강변에 안개가 끼여서 쬐깐 늦었읍니다이』
경운기 가득 옷보따리를 싣고 버스를 뒤따라 장터를 들어서는 옷장수 최석두씨 (54·전남 구례군 구례읍 봉남리) 가 장터입구에서 마주친 박귀순노인 (70·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래도 자네가 일찍 왔구마. 섣달그믐 대목장이 잘서야 될낀데이.』 30여년째 화개장터서 실타래·참빗등을 팔아온 터줏대감 박노인은 벌써 리어카에 「만물상」방물전 진열을 마치고 담배를 한 대 피워 문채다.
『이따가 우리 어무이·아부지 오시거덩 좀 보자카드라 해주이소』 하동이 친정인 최씨의 부인 여명옥씨 (46) 가 경운기 뒤쪽에서 박노인에게 말을 건넨다.
『와, 설에 물간이라도 보낼라꼬.』
『그래예. 게기 (생선) 라도 몇마리 사서 드리야 내맘이 편하지예.』 『안그래도 딸·사우 볼라고 갈낀데 머. 걱정 말그라』 나룻배를 타고 건너온 전남 광양운천리 사람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터로 들어섰고 하동·구례쪽서 버스를 타고 온 장꾼들도 무리무리 몰려 해가 중천만큼 솟았을땐 장은 북적대기 시작했다.
26일. 초하루·엿새에서는 경남하동 화개장터의 올해 마지막 장날. 언제부터인지 알수 없이 수수백년 오랜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지리산골짜기 섬률강변 하동·구례·광양 세고을 경상·전라사람들은 이곳 장터에 모여 옥신각신 살을 맞대며 물건을 사고 팔고 네니내니 미운정 고운정을 주고 받으며 한울타리 삶의 숨결을 나눈다.
『지역감정이 무엇이라요. 아 나는 전라도고 우리집사람은 경상도고, 전라도서 잠자고 경상도와서 장사하는디 전라도·경상도를 어떻게 따지것소.
따져서 뭣을 하요. 우리집은 경상도·전라도가 아니라 「전상도」·「경나도」요』 최씨는 부인 여씨와 옷가지를 팔다 말고 한마디로 딱부러지게 결론을 내린다.
전나도·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여 인사에, 흥정에, 잡담·입씨름에 장터는 왁자지껄하다.
『화개면은 주민의 30%가 전남출신입니다. 특히 이곳 화개장터는 절반정도가 구례·광양사람들이 와서 살고있어요.』
면장 전상준씨(48) 의 설명.
영·호남출신끼리 엇갈려 혼사를 맺어 최씨부부처럼 양도혼합 가정도 두집건너, 장터에서 마주친 영·호남사돈끼리 경상도·전라도 사투리로 인사를 닦는 모습도 장날이면 흔한 풍경이다. 『지리산 화갯골에서 밤과감·산채가 내려오고 위쪽 구례쪽에서 생활잡화 방물들이 육로·뱃길로 내려오고, 아랫녘 하동에서 해물장수들의 김·미역·명태·청각·자반·조기·고등어 생선들이 뱃길로 올라와 여기서 장이 섰지요. 한때는 우리나라 3대장으로 꼽힐만큼 흥청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규모가 반의반도 안됩니다』 면장 전씨의 말. 김동리소설 『역마』의 무대가 됐던 장터거리 주막도 10여년전쯤 모두 없어졌다.
하오5시 짧은 겨울해가 설핏설핏 기울면서 산골 장터는 이미 파장.
짐을 챙긴 최씨는 부인 여씨를 옷짐과 함께 경운기 뒤에 태우고 장터를 나섰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갈라놓은 강은 이곳 사람들에겐 생활을 이어주는 「길」일 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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