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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시대 연 다사다난한 한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언제부터인가. 해가 저문다는 일이 이처럼 쓸쓸하고 막막하게 느껴진 것이…. 그 허전함과 쓸쓸함 때문에 매번 세밑이 되면 별 일도 없이 허둥거리고 지척거리며 손에 일이 잡히지 않고 짧은 글 몇줄도 끄적거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엉거주춤한 감정의 줄다리기가 힘겨워 차라리 한달음에 새해가 와버렸으면 하는 심사가 되기도하고 한편으로는 단며칠만이라도 연기될 수있다면 하는 어리석은 가정을 세워보기도 한다.
아무려나 부질없이 지척이는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때는 어김없이 제 궤도를 굴러가고 있다. 이제 몇시간이면 이 해가 저물고 새해가 온다. 제야의 밤이오고 그리고 자정을 알리는 서른 세번의 인경소리가 울릴 것이다.
바로 한해가 끝나고 다시 한해가 시작되는, 아니 한 시대가 끝나고 다시 한 시대가 문을여는 장엄한 축포와도 같은 인경소리가 숙연한 제야의 장안을 울릴 것이다.
그러면 「…모두들 한밤의 독신자처럼/심야에 홀로 앉아/고독한 침묵을 길어 올리고/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것이다/지는해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더러는 승전고를 울리며 더러는 「마지막 집행에/백기의 빈손/빈손의 절망으로 돌아서서」허기와 공복같은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것이다. (출시중에서 인용)
생각하면 다사다난했던 한해였다. 잠시 생각나는 사건만도 박종철고문치사 사건을 시작으로 6월을 정점으로 하여 벌어진 민주화 대행진, 6·29선언이며 그에 잇달은 전국적인 노사분규 확산, 마침내 개헌과 총선, 야당의 명분없는 분당속에 제13대 대통령선출, 그 와중에 김만철일가의 북한탈출, KAL기 공중폭파참사며.「마유미」한국인도 대형경제사범에 AIDS공포소동등 참으로 눈이 핑핑도는 한해였고 역사적인 사건들로 점철된 87년이었다.
도시 인간이 찍어내는 불행이 얼마나 더 계속되고 복사될 것인가. 옛날 칼과 창으로 싸우던 시절엔 상상도 못하던 대형사고, 대형악들이 속출하고 있으니 인간은 끝내 자신이 만든 가스실에 스스로 걸어들어 가고야 말것인가.
『…하늘과 땅이 능히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스스로 자신이 살려고 하지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신이 하는 일을 뒤로 미룰때 실은 자신이 앞서게 되고 자신의 이익을 제외할 때 실은 자신 이거기에 있게 된다. 그것은 사심이 없기때문이며 사심이 없을때 능히 그자신의 이익이 성취되는 것이다』-노자의 『도덕경』제7장의 말이다.
생각하면 인간의 열정이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아름다운 힘이다. 그러나 열정이 지나쳐 과열이 될 때, 눈에 과열된 집념의 불을 켤때, 그는 자기자신뿐 아니라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말것이다.
명분없는 분당행위로 과반수 국민의 신의를 배반한 야당의 인사들은 바로 자신의 목표물을 잃었을뿐 아니라 더 큰 국민의 신망마저 잃어버린 실책을 진심으로 되새겨보아야 할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이면 누구나 알고있는 말이 있다. 바로 모든 잘못을『내탓이요 내탓이요 내 큰탓이로소이다』가슴을 치며 참회하는 겸손과 통회, 바로 눈에 들보를 뽑아버리고, 과열된 집념의 불을 끄고, 사심을 버리는 마음이다. 곧 순리를 따르는 마음이다.
순리를 좇고 순리를 따른다는 일은 결코 비겁이나 도피가 아니다. 인간의 도리,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일이며 바로 정도를 걷는 일이다. 정도란 실패와 고난이 있어도 명분이 있고 후회가 없고 다시 후사를 기약할수 있는 희망이있다. 그것은 실패해도 떳떳한 실패이며 만장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영예로운 패배다. 사도의 그릇됨을 무언으로 연설하는 증거가된다.
이제 정녕 「해가 진다/세계의 모든 거리 모든 창가에서/창마다 기대선 추운 가슴에서/한 묶음의 꽃이 지듯/해가 진다/1987년 저무는 잿빛 일몰의 아름다운 피곤/줄지은 대열의 침묵을 보라/길은 아직 희미한 안개속/우리가 올라온/구름의 계단도/다시 올라갈 내일의 산맥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다시 기다릴 수 있다. 새해란 언제나 지나온 어제, 잘못된 과거를 다시 고칠수있는 순백의 영토, 신이 허락하신 용서와 화해의 유예된 시간이기에….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분명코 『자유의 저변확대』를 향해 틀림없이 굴러가고 있음을 믿기에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이제 태어난지 한살밖에 안되는 우리들의 어린 민주주의를 위해 무던히 참고 지켜보며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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