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쇼 티켓 1장으로 7명 ‘도둑 입장’ 그렇게 한국 패션 이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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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진태옥 디자이너가 서울시 청담동 진태옥 샵에서 사진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진 디자이너는 1세대 디자이너이자 한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역사라 불린다. 우상조 기자

진태옥 디자이너가 서울시 청담동 진태옥 샵에서 사진촬영을 위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진 디자이너는 1세대 디자이너이자 한국 패션계의 살아있는 역사라 불린다. 우상조 기자

1965년 여성복 ‘프랑소와즈’를 시작으로 올해로 52년째. 88년 서울올림픽 유니폼을 디자인했고, 90년 서울패션디자이너협의회(SFAA)를 창단해 5년간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93년부터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고, 99년 영국의 예술전문 출판사 파이돈이 선정하는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는 등 전 세계인에게 한국 패션의 우수성을 알려왔던 한국 패션의 선구자. 하지만 83세의 현역 디자이너는 여전히 ‘꿈’을 묻는 질문에 “좋은 옷을 만들고 싶다”고 답한다. 이토록 단단하고 창의적인 인생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우리 시대의 멘토 ③ 패션 디자이너 진태옥 #한국을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함경남도 원산출신이다.
“14살이던 1948년에 온가족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 6.25전쟁이 터졌고, 1.4후퇴 때 제주도로 피난을 갔다. 함경도 여학생이 제주도로 갔으니 환경이 엄청 달라진 거다. 같은 한국말인데도 안 통했다. 작은 금반지를 현찰로 바꿔서 운동화를 사려고 하는데 말이 안통해서 결국 그냥 돌아왔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에 ‘화이트셔츠’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흙집 창문 앞에 오라버니의 흰색 (와이)셔츠가 걸려있는데 그 셔츠에 빛이 투과됐을 때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일평생 그때 그 감동의 여운이 오늘까지 디자이너 진태옥을 지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빛이 투과돼서 섬유조직이 투명하게 드러나던 광목은 그 어떤 비단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그때부터 광목은 ‘진태옥의 옷’을 말할 때 빠져선 안 되는 중요한 소재가 됐다.”    
진태옥 디자이너가 사랑하는 화이트셔츠 화보 컷. 진태옥 디자이너는 "때로는 여성스럽고 때로는 남성적이기도 한 중성적인 이미지가 화이트셔츠의 섹시한 매력"이라고 말한다. [사진 진태옥]

진태옥 디자이너가 사랑하는 화이트셔츠 화보 컷. 진태옥 디자이너는 "때로는 여성스럽고 때로는 남성적이기도 한 중성적인 이미지가 화이트셔츠의 섹시한 매력"이라고 말한다. [사진 진태옥]

디자이너 진태옥에게 ‘화이트셔츠’는 어떤 의미인가.
“끊임없이 나를 이끌고 지탱시킨 디자인의 근원, ‘화이트셔츠=진태옥’이다. 셔츠에는 참 재밌는 뉘앙스가 있다. 남자의 빅 셔츠를 여자가 입고 약간 뒤로 젖혀서 목을 드러내면 아주 섹시하다. 남성과 여성의 만남, 그 중성적인 지점이 굉장히 섹시하게 보이는 건데 내가 화이트셔츠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나를 이끌고 지탱시킨 디자인의 근원, 화이트셔츠”

남녀의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패션이란.
“어떨 때는 가장 여성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혹은 가장 보호해야 할 것 같은 실루엣으로 옷을 만든다. 남자가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여성스러운 옷이다. 반대로 굉장히 단순한 라인으로 남성적인 디자인을 만들기도 한다. 화이트셔츠는 그만큼 느낌이 다양하다. 어떤 때는 섹시하고, 어떤 때는 여성적이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남성적이다. 선탠을 한 여자가 화이트 셔츠를 입으면 야성미까지 있다. 그래서 ‘진태옥의 디자인은 셔츠가 시작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 바람에 이 나이가 됐어도 내 잠옷은 셔츠다.(웃음)”  
제주도에서 살던 여학생 시절, 흙집에 걸려 있던 오라버니의 광목 화이트셔츠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진태옥 디자이너는 한국 전통 소재이기도 한 광목 소재를 평생 사랑했다. [사진 진태옥]

제주도에서 살던 여학생 시절, 흙집에 걸려 있던 오라버니의 광목 화이트셔츠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진태옥 디자이너는 한국 전통 소재이기도 한 광목 소재를 평생 사랑했다. [사진 진태옥]

패션 디자이너 선배 노라노와의 인연.
“대학에 떨어지고 방황할 때, 서울 광교 옆을 지나다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의 의상실을 발견했다. 속눈썹이 인형처럼 길게 달린 여자 분이 빨간 매니큐어를 하고,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주인공 오드리 헵번처럼 긴 담뱃대를 들고 서 있었다. “의상실 이름이 왜 ‘노라노’인가” 물었더니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노라가 되기까지의 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때부터 패션 디자이너의 삶을 동경하게 됐다.”
결혼 후 뒤늦게 복장학원을 다니게 된 계기.
“힘들었던 시집살이에서 명분 있는 탈출구를 찾다가 나도 ‘노라’가 돼보자 결심했다. 처음에는 시어른들 몰래 학원을 다녔는데 숙제를 하느라 밤마다 재봉틀 소리를 내는 바람에 금세 들통 났다. 결국 ‘옷 공부를 해야겠다, 재주도 있는 것 같다’ 했더니 허락해주시더라. 그때부터 맘 놓고 큰딸 노승은(패션 디자이너)을 시어른들에게 맡기고 정식으로 복장학원엘 다녔다.”
1965년 명동에 오픈한 진태옥 디자이너의 첫 번째 숍 '프랑소와즈'. 당시에는 흔치 않던 프랑스식 이름으로 명동 멋쟁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사진 진태옥]

1965년 명동에 오픈한 진태옥 디자이너의 첫 번째 숍 '프랑소와즈'. 당시에는 흔치 않던 프랑스식 이름으로 명동 멋쟁이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다. [사진 진태옥]

1965년 명동에 낸 여성복 ‘프랑소와즈’ 숍이 시작이다.
“이름을 좀 근사하게 짓고 싶어서 프랑스에서 외교관을 지낸 선배 언니의 남편에게 부탁해서 불어로 이름을 지었다.(웃음) 덕분에 멋쟁이 고객들이 많이 왔다.”
단골 연예인도 많았겠다.
“당연히. 영화배우 문희씨하고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어떤 연예인은 의상실에 오면 정신이 없는데, 문희씨는 가만히 앉아서 내가 제안하는 것들을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곤 했다. 여러 모로 나와 잘 맞았고, 나중에는 이웃으로 살 만큼 친했다.”

“노라노, 이병복 선생을 보며 패션 디자이너 꿈꿔”

한국 패션의 선구자로 불리는 진태옥 디자이너의 젊은 시절 모습. 오래된 사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세련된 모습이다. [사진 진태옥]

한국 패션의 선구자로 불리는 진태옥 디자이너의 젊은 시절 모습. 오래된 사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세련된 모습이다. [사진 진태옥]

꼬마 배두나는 최연소 손님이었겠다.
“멋쟁이 엄마(연극배우 김화영)의 손을 잡고 자주 왔다. 지금도 배두나를 만나면 ‘너 기저귀 차고 우리 숍에 온 거 기억하니’ 물어보곤 한다.(웃음) ”
한국 연극무대 설치미술가 1세대 이병복 선생과의 인연.
“이 선생이 명동에서 살롱(1961년 오픈한 ‘네오 의상실’)을 할 때, 하루에 한 번씩 그 쇼윈도를 통과했던 걸 보면 천생 디자이너가 되려고 그랬나 보다. 내가 그렇게나 동경하는 도시 파리의 분위기가 온몸에서 풍겼던 분이다. 생머리에 긴 말 장화를 신은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돼야지’ 결심했었다. ”
1970년대부터 가깝게 지낸 연극 배우 윤석화(왼쪽), 박정자. 진태옥 디자이너의 전시회장을 찾았을 때의 모습. [사진 진태옥]

1970년대부터 가깝게 지낸 연극 배우 윤석화(왼쪽), 박정자. 진태옥 디자이너의 전시회장을 찾았을 때의 모습. [사진 진태옥]

손숙, 박정자, 윤석화와도 각별한 인연.
“60~70년대부터 알고 지낸 꽤 오래된 사이이다. 특히 성격이 활달하고 스스럼이 없던 윤석화씨가 프랑소와즈 숍에 처음 들어온 날 ‘저는 가수 윤석화입니다’라고 인사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이 아가씨 봐라, 예쁜 아가씨가 쾌활하기까지 하네’ 생각했다.”
90년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을 때 진태옥 디자이너가 모델들과 함께 파이널 무대 위를 걷고 있다. [사진 진태옥]

90년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을 때 진태옥 디자이너가 모델들과 함께 파이널 무대 위를 걷고 있다. [사진 진태옥]

93년 파리 컬렉션(프레타 포르테) 첫 진출 후 수지 맨키스의 극찬을 받았다.
“수지 맨키스라는 사람이 어떤 영향력을 가진 기자였는지 전혀 몰랐다. 파리에서 처음 쇼를 하는 날이라 ‘누가 내 쇼를 보러올까’ 불안하기만 했다. 아는 기자도 없고, 아는 바이어도 없어서 ‘이럴 거면 그냥 딱 한 사람만 앉혀놓고 쇼를 하자’ 했더니 스태프들이 웃더라. 쇼가 막 시작하려는데 무대 뒤에 있던 모델들이 수근 거렸다. 얘들이 한국 디자이너라고 업신여겨서 이러나 했는데 알고 보니 ‘수지가 왔다’는 거다. 쇼 끝나고 무대 뒤로 어떤 여자가 오더니 나한테 악수를 청하면서 자기를 ‘수지 맨키스’라고 소개하고는 ‘내가 너하고 악수하기 위해 5분을 기다렸다’며 웃더라. 그때도 그 사람의 존재를 못 느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호텔 프론트 데스크 위의 신문을 보니까 내 옷이 보였다. 누가 내 것을 카피했나보다, 내가 쓴 원단하고 똑같네, 한참 놀라고 있는데 사진 밑을 보니까 ‘진태옥’이라고 쓰여 있더라. 눈물이 났다. 요지 야마모토, 크리스찬 라크르와, 마틴 싯봉, 로메오 질리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 가운데 진태옥이 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던지. 아, 내가 뭐를 해내긴 해냈구나 싶어 뿌듯했다.”
진태옥 디자이너가 90년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을 때 쇼장을 찾은 유명 패션 칼럼니스트 수지 멘키스. 그는 "진태옥의 옷은 시와 같다"는 표현을 한 바 있다. [사진 진태옥]

진태옥 디자이너가 90년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을 때 쇼장을 찾은 유명 패션 칼럼니스트 수지 멘키스. 그는 "진태옥의 옷은 시와 같다"는 표현을 한 바 있다. [사진 진태옥]

“나를 정립시켜준 수지 멘키스의 한마디 ‘너의 옷은 시(詩)다’”

50주년 기념 책에 추천사를 쓰게 된 사연.
“2015년 수지 멘키스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시 만났는데 그가 ‘여전히 너를 기억한다’며 ‘너의 옷은 시(詩)다’라고 말해줬다. 50주년 전시회 도록을 준비할 때 ‘네가 표현한 그 한마디가 나를 정립시켜줬다, 그러니 네가 추천사를 한 번 써줄 수 없겠느냐’ 했더니 쾌히 승낙하고 써줘서 고마웠다.”
90년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을 때 진태옥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런웨이에 섰던 프랑스 배우 줄리 델피(왼쪽)와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모습. [사진 진태옥]

90년대 파리 컬렉션에 참가했을 때 진태옥 디자이너의 옷을 입고 런웨이에 섰던 프랑스 배우 줄리 델피(왼쪽)와 슈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모습. [사진 진태옥]

99년 영국의 예술전문출판사 파이돈이 꼽는 ‘20세기를 빛낸 패션인 500인’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사실 90년대에 파리 컬렉션에 나간 건 큰 소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한국에도 이런 패션이 있다는 걸 제대로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도 이런 디자인이 있다는 것, 이런 감각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외국인들의 눈엔 30점짜리든 50점짜리든, 우리가 지금 어느 시점에 와있는지 확인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우리 패션이, 우리 디자인이, 우리의 감성이 담긴 옷이 외국에서 어떤 호응을 보이는지 그때는 국내에서 전혀 가늠을 못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실험을 한 거다. 그런데 세계 패션인 500인에 선정되기까지 하니까, 나로서는 내가 할일을 했구나 안도가 됐다.”
1990년 SFAA(Seoul Fashion Artist Association) 설립 멤버다.
“이 얘기만 하면 정말 신이 난다.(웃음) 우리도 파리 컬렉션 같은 걸 해보자고 디자이너들끼리 의견이 모아졌는데 무슨 샘플이 있어야 하잖나. 지금으로 말하면 벤치마킹할 만한 것.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의 유명 컬렉션들은 기자·바이어 등 초대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으니 우리로선 난감했다. 그때 일본 패션 브랜드인 이세이 미야케에서 VIP 고객들에게 파리 컬렉션 티켓을 준다는 정보를 얻었다. 무작정 일본으로 가서 옷을 샀다. 그때 돈으로 아마 600만원 어치 정도 산 것 같다. 매장 매니저에게 ‘티켓을 달라’고 했다. 안 그러면 이거 다 반품한다고. 그렇게 티켓 한 장을 구했는데 당시 스파 설립를 준비하던 디자이너는 7명(박윤수·한혜자·설윤형·박항치·오은환·루비나)이었다.”

“돈도 경험도 없이, 힘들고 무모하게, 지금까지 대한민국 패션이 온 거다.”

티켓은 한 장인데 사람은 7명, 어떻게 했나.
“일단 7명이 파리에 도착해서 함께 쇼 장으로 갔다. 공원에 30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천막을 친 곳이었는데 입구 직원들한테 ‘나 티켓이 한 장밖에 없는데 내 친구들을 함께 들여보내 줄 수 없니?’ 물었다. 정말 순진했지. 당연히 안 된다는 답이 돌아왔고다. 결국 나 혼자 입장해서 핸드백에 티켓을 넣은 다음 천막 밖으로 던졌다. 그렇게 연속으로 핸드백을 던져서 7명이 쇼 장에 다 들어갔다. 정해진 자리가 없으니 맨 뒤에서 까치발을 한 채 쇼를 보는데 그 열기가 말도 못했다. 한마디로 문화적 쇼크였다. 쇼가 끝난 후 공원에서 걸어 나오는데 우린 모두 다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맥주를 한 잔씩 마시는데 너무 침통한 분위기였다. 울음소리도 들리고. 우리 입장이 너무 한심스러우니까 막 복받쳐서 몇 명이 울더라. 그래도 힘내서 우리 해보자, 이렇게 시작한 것이 스파였다. 돈도 없고, 경험도 없이, 그렇게 힘들게 무모하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대한민국 패션이 온 거다.”
진태옥 디자이너와 함께 한국 패션을 이끌어 온 동료 디자이너들. 제일 왼쪽에 서 있는 남자가 패션 디자이너 박윤수씨다. [사진 진태옥]

진태옥 디자이너와 함께 한국 패션을 이끌어 온 동료 디자이너들. 제일 왼쪽에 서 있는 남자가 패션 디자이너 박윤수씨다. [사진 진태옥]

1985년과 2015년에 한불수교 기념 전시회를 하며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30년 전에도 파리에서 똑같이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 전시를 했는데, 현지반응이 130주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달랐다. 100주년 때는 한국의 존재감이 너무 작았다. 전시 장소도 조그맣고, 오는 사람도 전부 한국교민들뿐. 신문에 전시 기사 한 줄이 안 났다. 돌아오는 길에 굉장히 회의감을 느꼈다. 내가 이걸 왜 했지? 누구를 위해 한 거지? 그런데 130주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깜짝 놀랐다. 장소도 파리장식미술관이었다. 당시 에펠탑 앞에선 젊은 애들이 싸이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만큼 한국이 많이 알려졌고, 전시회도 성공적이었다. 자랑스러웠다. ”
2015년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데뷔 50주년이기도 했다.
“50주년 전시회를 열었는데 일종의 반성문이나 일기장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작품을 대하는 나의 철학이 또 한 번 정리되는 계기가 됐다.”
진태옥 디자이너는 서양식 옷을 만들지만 언제나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자수로 넣은 베스트. [사진 진태옥]

진태옥 디자이너는 서양식 옷을 만들지만 언제나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자수로 넣은 베스트. [사진 진태옥]

서양식 옷을 만들지만 신사임당의 초충도나 궁중 활옷을 활용하는 등 꾸준히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해왔다.
“디자인의 영감이라는 게 생각해보면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우리 정서·문화의 DNA가 근원이 되는 것 같다. 어떤 동기로 인해 탁 건드려지면 그것이 다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항상 더듬이가 열려있다. 다 흡수하고, 느끼고, 결국 내 것으로 만들어 이 안에 담아두면 언젠가는 그게 폭발하게 돼 있다.”
글로벌 시장에 나갈 때 한국적인 코드가 꼭 필요할까.
“그건 그렇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은 자식이 부모를 닮듯, 우리의 DNA는 우리 안에 있으니까. 우리 문화와 전통, 정서와 예술, 이런 DNA가 우리한테는 늘 있다. 그 DNA를 잊지 갖고 작업을 하면 티셔츠 하나를 심플하게 만들더라도 한국적인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식이 부모를 닮듯, 우리의 DNA는 우리 안에 있다.”

진태옥 디자이너와 딸 노승은 패션 디자이너. [사진 진태옥]

진태옥 디자이너와 딸 노승은 패션 디자이너. [사진 진태옥]

80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건강관리 비결이 따로 있나.
“수영과 스트레칭을 열심히 한다. 건강도 건강이지만 옷과 디자인에 대한 열정이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패브릭만 봐도 흥분하고, 디자인 요소만 봐도 떨리고. 그 열정이 나를 쉬게 하지 않는다. 항상 나를 긴장하게 만드는 열정, 그게 건강을 잃지 않는 비결이다.”
꽤 오랫동안 유지해온 저녁식사 습관이 있다고.
“저녁엔 소식을 하는데 특히 탄수화물을 적게 먹고, 대신 채식을 많이 한다.”
패션디자이너로서 지금 바라는 꿈이 있다면.
“여전히 디자인을 잘하고 싶다. 소비자가 소장가치를 둘 만한 그런 작품을 만들고 싶다.”
진태옥, 디자이너.

진태옥, 디자이너.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조언한다면.
“모두들 너무 잘 하고 있어서 조언이 될 것 같지 않지만, 결국 열심히 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문화적 자산과 현시대의 정보들을 전부 다 흡수해 내 안에서 여과시킨 후 표현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나만의 아이디어와 감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삶의 원칙이 있다면.
“정직하고 싶다. 내가 하는 일에, 양심에 조금이라도 거리끼면 그건 잘못된 거다.”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요즘 젊은이들은 굉장히 욕심이 많은 것 같다. 상당 부분 자신의 현실하고는 안 맞는 욕심들이다. 그 욕심을 버리면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성공이라는 게 어떤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건 아니다. 작은 일에도 스스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는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 진태옥은 …

●1934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65년 여성복 ‘프랑소와즈’,
2004년 토털 리빙 ‘태홈(TEHOME)’ 설립.
1990년 서울패션디자이너협회(SFAA·Seoul
Fashion Artist Association) 결성 및 초대회장 역임
●93~97년 파리컬렉션 여성복·남성복 참가,
96년 (주)클리포드와 진태옥 넥웨어
라이선스 브랜드 전개
●2011년 ‘우리 옷 배자’ 아름지기 전시 in 런던,
2015 한불수교 130주년 ‘한국문화전’ in 파리,
‘진태옥 50주년 앤솔로지’ 전시 in 서울

글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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