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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역사적 추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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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유례없는 열기와 긴장 속에서 진행되던 선거는 어떻든 끝나고 새 대통령이 확정되었다. 이 선거 결과에 대한 기대와 실의가 깊은 골을 이룰수록 이제 우리는 그만큼 착잡한 심정을 이겨내면서 12·16의 진정한 의미를 반추하고, 비록 같은 여권 내부의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헌정사상 처음으로 실현되는 평화적 정권교체의 가능한 의의를 되살려내도록 진지한 점검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끝까지 실망하지 않도록 위로를 주는 말은 우선 제정으로의 반동과 공화정으로의 혁명이 반복되던 시기에 미국의 민주주의에 깊은 신뢰를 보인 19세기 프랑스의 정치학자 「토크빌」의 명언이다. 『민주주의의 진전은 불가피하다. 그것은 역사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장 통일되고 가장 오래되며 가장 영원한 추세이기 때문이다』 라는 그의 말은 오늘의 우리에게 새로운 충고로 받아들여진다.
여야간의 합의개헌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던 작년 이맘때, 혹은 개헌 논의가 보류되고 다시 반동의 시기로 돌아갈 것 같던 지난봄, 또는 격렬한 거리의 항의로 나라의 안위가 걱정스럽던 불과 반년 전을 돌이켜볼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걸음을 앞으로 전진시켜 왔는가.
그리고 일어나서는 큰일일 것 같던 지난 여름의 거대한 노사쟁의도 잘 치러냈고, 선거가 시작되면서 이 정권이 은폐하고 있던 12·12, 5·18 사태에 대한 도덕적 명분의 문제 제기를 통해 우리 통치 집단에 대한 반민주적 금기 체계를 깨뜨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추세임이 이 선거의 승자나 패자, 기대를 품은 자나 실의에 빠진 자 모두에게 확실히 인식된 것은 이번 대통령선거가 우리에게 안겨준 가장 큰 보람중 하나일 것이다.
이 선거의 승자는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기쁨을 하잘것없이 만들, 보다 더 큰 문제들을 해소할 책임을 이제 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우선 그 발생부터 깊은 회의를 받고 있는 권력의 정당성을 새로이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 어려운 과제는 군정 종식을 주장하는 두 야당 지도자를 합친 것보다 18%나 적은 지지표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사실로 더욱 해소하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더우기 그는 선거기간 중에 나타난 지역감정, 부정선거 시비로 인한 항의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소·극복해낼 것인가의 곧바로 대응해야할 문제들에도 부닥칠 것이며, 나아가 한편으로는 멀지 않아 다시 제기될 노사분규와 학생시위, 급진적 이념운동들, 다른 한편으로는 유신이후 15년, 혹은 5·16이후 27년 동안 적체되어 온 군사정치의 부정적 구조를 참된 민정의 체제로 전환시킬 숙제를 한꺼번에 만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강력한 정부」 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은 「넓고 부드러운」 안목과 정책이 함께 필요한데 12·12와 5·18의 부담을 안고 있으므로 이 과제들의 심각성은 더욱 깊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어떻든 새 대통령과 그 지지자들이든, 그가 아닌 다른 후보에게 투표한사람들이든 모두가 민주화야말로 우리의 일치된 정치적 욕구라고 동의할 것이기에, 군인 출신으로 대통령이 된 미국의「아이젠하워」가 남긴 『인간의 존엄성, 경제적 자유, 개인의 책임, 이것들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다른 형태로부터 민주주의를 구별시키는 특징들이다』 라는 말을 앞으로의 통치 지표로 삼아주기를 새 대통령에게 축하 대신으로 전한다.
당선된 분에게 축하대신 고언을 보낸다면 그 동안 장한 일을 해온 두분 야당 지도자에게는 격려를 보내야 할 것 같다.
유신체제이후 어떤 억압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강인하게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노력해온 노고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새로이 정당을 일으킨 지 몇 달만에 집권당이 가질 수 있는 갖가지 특혜를 업은 여당후보와 당당히 경쟁하여 55% 가까이 국민적 지지를 획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야말로 지면서도 이기는 보람이고, 우리에게 외국신문이 기대하는 정치적 「기적」이 눈앞의 실체로 나타난 모습일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를 향한 전도는 우리 모두의 욕구를 하나의 힘으로 엮은 바로 이분들의 존재를 통해 희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당장에, 그것도 한꺼번에 이룰수는 없지만, 그러나 보다 튼튼하고 당당히 이룰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을 이번의 선거를 통해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두 김씨는 차제에 자신들의 패배에 대한 깊은 반성과, 「40대기수론」을 외치던 과거의 주장을 오늘날 어떻게 대응시킬 것인가를 긴 눈으로 구상해 보아야 한다는 권고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선거 기간을 통해 어지러워지긴 했지만 결코 그 끈질긴 의지가 꺾이지 않을 재야 민주세력에 힘찬 박수를 보내며 앞으로 더 크게 감당해야할 그들의 기여에 큰 기대를 보낸다.
이들의 고통스런 노력이 없었더라면 당장 12·16의 선거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우리 손으로 우리 대통령을 뽑는다는 감개도 갖지 못했을 것이고, 더우기 우리의 진정한 민주주의적 지향에 밝은 희망을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재야 민주주의 세력은 그 동안 현실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잠시 보였던 갈등과 혼란을 순수한 민주주의적 실천 세력의 공동목표 정립이라는 기치 아래 새로이 정비하며, 앞으로 보일지도 모를 반민주화의 힘을 견제하고 민주주의를 제도로부터 개개인의 심상에 이르기까지 기본 원리로 뿌리 박히도록 더욱 힘든 싸움을 벌여야 할 것이다.
그리스의 비극작가「애스킬루스」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민주주의를『고통으로부터 배워왔다』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상의 정치 체제를 위해 숱한 희생을 치러왔고, 민주주의는 또 그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8·15와 민주적 제도를 밖으로부터 거의 거저 얻어온 것이기에 이제껏 그것에 치러야할 값을 우리는 지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선거 결과에 우리가 여전히 실망하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갚을 빚이, 그러나 조금만 남아 있다고 치부하고, 완전히 청산될 때까지 즐거운 마음과 넓은 눈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감당할 수 있는 격려의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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