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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팬 없으면 인기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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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봤을 때부터 너 맘에 들지 않았다. 너 때문에 음악 방송을 보기 싫었지. 네 또래에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애들 쫙 깔렸다. 걔들은 거의 네 안티지. 엄청 뛰어나게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닌데 왜 나온거야? " (회원수 4만3천9백92명, 한 가수의 안티 팬 카페 게시문 중에서).

싫다. 무조건 싫다. 모조리 싫다. '안티 팬'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은 비단 연예인뿐 아니다. 특정 연예인이 나오는 방송국 드라마가 싫고, 그 연예인이 소속된 기획사도 싫고, 심지어 그 연예인과 친한 것으로 알려진 단짝 연예인조차 싫다.

연예인들의 스케줄을 척척 알아내 방송국을 쫓아다니며 환호하는 팬들이 있는 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내가 그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 등의 제목으로 빼곡히 글쓰는 데 열 올리는 안티 팬이 있다. 안티 팬이 우리 문화의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안티 팬이 많다는 것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골수 팬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안티 팬의 숫자가 인기와 비례하는 셈이죠. 요즘 연예계에서는 안티 팬사이트 하나쯤 갖고 있지 않다면 인기를 의심해 봐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한 유명 가수 매니저의 설명이다. 연예 기획사에서는 안티 팬들을 이미 팬클럽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다.

한 기획사의 관계자는 "안티 팬이 주로 외모나 개인적인 배경 등 가수나 탤런트의 본질적인 것에서 벗어난 것들을 시비대상으로 삼는 게 안타깝다"면서도 "그러나 이 역시 소속 연예인에 대한 의견의 일부이므로 안티 팬사이트를 모니터링하지 않는 기획사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작 안티 연예인 사이트는 대부분이 '욕잔치'를 위한 살벌한 사이버 공간이다. '××처단''××반대''××가 짱나!('짜증나'의 준말)라는 말은 차라리 애교로 들린다. ' ××죽이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특정 연예인을 인격모독성 비방이나 욕설로 공격한다.

이쯤하면 '비판'은 고사하고 '질투'를 넘어서 '테러''폭력'수준으로 치닫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문희준 자살' '변정수 사망' 등 허위 사실을 유포하거나 '배꼽수술을 했다''가슴 수술을 해놓고 왜 속이느냐'는 등 성형수술 문제 삼기, 얼굴부터 팔.다리.허리 등 신체 부위에 대한 비하 등 안티 팬들의 행태는 다양하다.

최근에 일어난 SM엔터테인먼트의 문희준 안티 사이트 고소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 문희준 소속사인 SM 측에서 75명의 네티즌과 세개의 사이트를 정식으로 경찰에 고소한 것이다.

SM측은 이들 안티 팬사이트에서 이상하게 변형된 각종 이미지와 플래시 애니메이션 등을 만들어 공유함으로써 명예훼손은 물론 초상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했다.

안티 팬 사이트인지, 포르노 사이트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곳도 많다. 하지원은 최근 팬이라는 남자로부터 사이버 '성희롱'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 20대 용의자가 체포됐다.

때로 안티 팬은 특정 연예인의 방송 출연을 결정(?)할 만큼 위력을 발휘한다. 최근 방송활동 재개를 준비하고 있는 가수 백지영이 지난 2년간 지상파 무대를 떠나야 했던 데는 안티 팬들의 저항이 가장 컸다.

한때 '다이어트 파동'으로 방송을 떠났다가 최근 복귀한 개그우먼 이영자도 이전에 복귀를 시도하다 네티즌들의 거센 반대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이 밖에도 요즘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이효리를 비롯해 유승준.보아.세븐.전지현, 장나라, 장서희 등도 극성 안티 팬이 있으며 신인가수 서연과 영화배우 박한별은 데뷔하자마자 안티 팬을 얻었다.

이가 엔터테인먼트의 이한우 실장은 "경쟁심리 때문인지 한 연예인의 골수팬은 다른 연예인의 안티 팬이 되는 경우가 적잖다"면서 "안티 팬들의 심리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자부심, 혹은 또래 연예인에 대한 질투심과 상대적 박탈감 등의 감정이 섞여 있는 것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는 "우리 문화뿐 아니라 정치.사회 분야 발전을 위해 안티 세력(팬을 포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도 더 커질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비판자로서 기본적인 철학이나 예의도 갖추지 못한 지금 같은 안티 팬 현상은 절대로 안된다"고 말했다.

강씨는 "비판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우선돼야 한다"면서 "진정한 비판이 되려면 '익명성'을 이용해 무책임한 발언을 마구 쏟아내는 비겁한 태도를 먼저 버려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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