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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공학도가 필요없는 세상이 됐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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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일 오후 서울대 공과대학 32동 건물. 입구에 설치된 거대한 원자로 실험장치는 원자력 관련 연구와 실험을 진행하는 곳임을 알려준다. 이곳엔 총 4개 동에 걸쳐 원자력 시스템, 핵융합·플라즈마, 방사선·아원자 입자와 관련된 연구실들이 빽빽하게 붙어 있다. 14명의 교수와 약 300여명의 학부생·대학원생들은 제각각 원자핵공학 전공수업과 실험에 바쁜 모습이었다. 빛 차단용 고글을 쓴 채 열수력 실험에 몰입한 학생, 맞은 편 연구실에서 흰 가운을 입고 방사선 생명공학 실험에 빠진 학생 등이 눈에 띄었다. 외부 통로를 통해 31동으로 건너가보니 건물 1층에는 학과의 자랑인 ‘VEST(Versatile Experiment Spherical Torus)’라는 핵융합실험장치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지만 건물 밖에서 만난 학생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박주룡(23·서울대 원자핵공학 4년)씨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본 뒤 우리나라 원전만은 안전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에 원자핵공학과에 입학했다. 박씨는 “최근 탈원전 정책 발표 때문에 공부할 의욕이 없어졌다”며 “이제 ‘원자력 공학도가 필요 없는 세상이구나’라는 느낌마저 든다”고 했다. 김도현(24·서울대 원자핵공학 3년)씨는 “탈원전 움직임으로 인해 학과 분위기가 흉흉하다”며 “기업체에서 원자력 전공생은 채용하지 않으려는 동향도 점점 늘어난다”고 했다.

 국내 최초로 개설된 한양대 원자력공학과도 침울한 표정이었다. 현재 204명의 재학생들이 속한 원자력공학과는 1958년 고(故) 김연준 당시 한양대 총장이 설립했다. 국내 원자력학계의 시초라는 점에서 자부심이 남다르다. 그러나 학생들의 얼굴에는 자부심보단 우려가 깔려 있었다. 이한규(25·한양대 원자력공학 4년)씨는 “취업을 준비해야 하는 고학년이라 탈원전 논의로 인해 관련 공기업과 연구소 신입사원 채용 인원이 줄어들까 걱정”이라며 “최근 한국수력원자력도 신입사원 채용 인원을 대폭 감축해 원자력공학과 학생들은 실질적으로 불이익을 체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문희수(23·한양대 원자력공학 2년)씨는 “탈원전 논의 이전까지 60명 정도였던 원자력공학과 전공 수업 수강 인원이 이번 학기에는 40여명으로 줄었다”며 “교수님이나 학과장님께 전화로 전과(轉科) 절차에 대해 문의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원자력 산업의 시초는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 전기기술 분야의 대가 W.L 시슬러와의 만남을 계기로 원자력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한·미 협정을 체결했다. 이 전 대통령은 같은 해 문교부 기술교육국 안에 원자력과를 개설했다. 이를 발판 삼아 58년에 한양대 원자력공학과가, 이듬해에는 서울대 원자력공학과(현 원자핵공학과)가 설립됐다. 이러한 노력과 연구 끝에 78년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자로 고리 1호기가 준공됐다.

 지난 6월 수명 40년을 다한 뒤 영구 정지된 고리 1호기는 당시 우리나라의 전력 부족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후 월성 1호기 등 잇따라 준공된 원자력발전소들은 안정적인 전기에너지를 제공함으로써 현재 우리 경제의 기반이 된 철강·조선·중공업·자동차 등 주력 산업을 뒷받침해왔다. 황용석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우리나라가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를 빠르게 극복한 배경에는 원자력의 값싼 전기를 기반으로 산업 시장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대한민국이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도 원자력의 힘이 컸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성장 1등 공신’에서 ‘천덕꾸러기’로 한순간에 전락하면서 원자력 학계의 고민은 커지고 있다. 김찬형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자력 산업은 사람의 지식으로 에너지를 얻는 사업이기에 우수한 인력이 필요하다”며 “탈원전으로 인해 우수한 학생들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원자력 산업계와 연구계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응수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원전의 위험성을 부각하기 위해 왜곡된 자료들이 대중들에게 유포되는 것도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전국 13개 대학 원자력 관련 학과 학생회가 모인 ‘전국원자력대학생연합’도 결성됐다. 이들은 지난 7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우리나라는 충분한 시간도, 적법한 절차도, 전문적 지식 공유도, 어떠한 담론도 없이 어려운 결정을 쉽게 내리려 한다”며 “수많은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하고 비전문가로부터 정책을 조성하려 하는 현 정부의 태도가 과연 민주적인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중앙대 대표 변현기(24·중앙대 에너지시스템공학 3년)씨는 “순수하게 원자력을 공부하고자 학과에 진학한 우리는 어느 순간 부정적 의미의 ‘원전 마피아’로 전락해버렸다”며 “원자력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며 우리들의 입장을 표명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홍진우 서울대 공대 학생회장(21·화학생물공학 3년)은 “과학기술계가 정권의 변화에 영향 받지 않고 안정적인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의 원자력 관련 학과는 총 20곳이며 재학 중인 학부생은 3600여 명, 대학원생은 850여 명에 달한다.
김솔·이유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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