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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7000억원 들여 연장했는데…'사망' 선고 앞둔 월성1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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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훈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1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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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이 간다] 7000억원 들인 수명 연장 … 사망 선고 앞둔 월성 1호기

경북 경주시 양남면 월성원자력본부. 왼쪽부터 월성4호기, 3호기, 2호기, 1호기.(위 사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학생들이 원자력 응용 실험을 하고 있다.(아래 사진) [월성=프리랜서 공정식], [서울대=이유진 인턴기자]

경북 경주시 양남면 월성원자력본부. 왼쪽부터 월성4호기, 3호기, 2호기, 1호기.(위 사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학생들이 원자력 응용 실험을 하고 있다.(아래 사진) [월성=프리랜서 공정식], [서울대=이유진 인턴기자]

이번에는 월성 1호기다.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재개로 수그러들던 탈(脫)원전 공방이 월성 1호기의 폐쇄 여부로 옮겨붙고 있다. ‘월성 1호기의 조기 가동 중단’을 공언한 문재인 대통령의 뜻에 따라 11월 중 ‘사망’ 시기가 결정된다. 그 파장은 크다. 국내 최초의 원전인 고리 1호기는 지난 6월 수명 40년을 마치고 영구 정지됐다. 하지만 월성 1호기는 안전성 문제가 아닌 정치적 판단에 따라 운행 도중 퇴출당하는 첫 사례가 된다. 주민 합의를 거쳐 연장된 월성 1호기의 생명을 정권이 일방적으로 단축하는 첫 실험이기도 하다. 대학가에선 ‘원자력 학과 붕괴’라는 연쇄 반응을 일으킨다. 생사의 갈림길에 선 월성 1호기를 찾았다.

내진 등 9000건 안전 대수술 #2022년까지 10년 가동 늘려 #법·과학 아닌 정치논리 따라 #내달 조기 폐쇄로 결정 날 듯

지난 25일 월성 1호기를 보기 위해 경북 경주시 양남면으로 향했다. 월성 2·3·4호기와 신월성 1·2호기가 나란히 바닷가를 향해 서 있었다. 철근콘크리트로 만든 원자로 격납(格納) 건물(reactor containment building)에 접근하자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50m쯤 되는 높이와 1.2m 두께의 월성 1호기 격납건물은 핵연료가 타면서 열과 방사능을 발생시키는 원자로를 감싸고 있다. 방사능 유출의 재앙을 막기 위해 리히터 규모 7.0의 지진을 견디고 항공기 충돌에도 뚫리지 않게 설계됐다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암’ ‘기형’ ‘죽음의 땅’ 등 환경단체들이 쏟아낸 살벌한 단어들이 던지는 공포감이 더 강렬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기억이 생생한 데다 최근 북한의 핵무기 위협까지 더해져 불안감은 컸다.

월성 1호기는 1982년 11월 발전을 시작한 뒤 2012년 11월 설계수명 30년을 마치고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런데 안전 보강 조치를 거쳐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5년 6월 재가동에 들어가 2022년 11월까지 10년간 연장 운전하도록 했다. “안전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안재훈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 팀장)는 주장은 그래서 나온다. 이에 대해 월성 1호기와 24년째 함께 일해 온 최원식 발전운영팀장은 “계속운전을 위해 내진 강화 등 9000여 건의 설비·안전 사항을 보강하는 대수술을 했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들어간 돈이 7000억원이다. 안전성에 자신 있다는 얘기다. 법원도 인정했다. 월성 1호기 주변 주민은 올 초 “방사성 물질 노출에 따른 갑상샘암 발병, 원전 안전과 지진 발생의 위험성을 들어 원전 가동을 즉각 중단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운전을 중단할 긴급한 필요성이 소명되지 않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월성 1호기에서 일하는 A씨(55)는 “노후화로 폐쇄한다고들 하는데 늙으면 다 죽어야 한다는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월성 1호기는 시한부 생명을 이어가는 초라한 신세다. 원전의 ‘두뇌’에 해당하는 주(主)제어실에는 긴박감이 없었다. 원자로를 비롯해 터빈·연료·전기설비 등 4개 제어반의 계측기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지만 대부분 ‘죽어 있었다’. 열을 내뿜는 원자로도, 원자로에서 만들어진 고온·고압의 수증기를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터빈도, 연료제어반도 가동을 멈췄다. 실시간 발전 상황을 알리는 전자판에는 ‘월성1’을 ‘0’으로 표시했다. 월성 1호기의 전기 생산량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특별히 하자가 없는데도 상부에서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 140여 일째 가동이 중단된 상태라고 한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성 1호기의 생사는 법원의 손에 있다. 수명 연장에 반발하는 주민 2000여 명이 낸 소송에서 지난 2월 1심 법원은 “수명연장 처분을 취소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가 항소하면서 가동은 계속될 수 있다. 그런데 법과 과학이 아닌 정치논리가 끼어들어 복잡해졌다. 문 대통령이 조기 폐로(廢爐)를 천명했기에 그의 임기(2022년 5월) 안에 월성 1호기는 죽음을 맞이할 공산이 크다. 원안위가 항소를 포기해 곧바로 폐쇄하는 정치적 방식이 유력하게 떠오른다. 최종 판결이 난 뒤 월성 1호기의 사망 선고를 해도 늦지 않은데 말이다. 과학에 근거한 논쟁이나 법은 졸지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전문성이 없는 정치권이 이슈가 아닌 것을 이슈로 삼는 경향이 있다”(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지적이 현실화하고 있다.

주민들 사이의 찬반 갈등도 재연될 조짐이다. 월성발전소로 향하는 길목에는 주민 800여 명의 ‘나아리’라는 자그마한 해변 마을이 나타난다. 지난해 9월 진도 5.8의 지진이 일어난 경주시 내남면에서 직선거리로 27㎞쯤 떨어졌다. 원전의 안전성에 민감하다.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에 환영해야 할 주민들의 반응은 약간 의외였다. 길거리에선 찬성이나 반대를 요구하는 그 흔한 펼침막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은 ‘폐쇄→연장→폐쇄’라는 냉·온탕 정책에 혼란스럽다. 나아리 해변에서 20년째 횟집을 운영하는 경선희(61)씨는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이 여의치 않자 괜히 월성 1호기의 조기 폐쇄를 들고 나와 정부 정책에 대한 혼란과 불신만 키우게 됐다”고 말했다.

조기 폐쇄할 경우 수명연장에 따라 약속한 지원금을 계속 지급할지도 관심사다. 인근 마을들은 월성 1호기의 발전량에 따라 2022년 11월까지 ‘상생 합의금’ 1310억원을 발전소에서 받기로 돼 있다. 이 중 상당액이 집행됐으나 남은 5년 동안의 지원금은 끊길 수 있다. 김지태 양북면체육회장(51)은 “월성 1호기의 수명 연장 때 주민 여론을 물어서 결정했으니 조기 폐쇄 여부도 주민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월성 2호기(2026년)·3호기(2027년)·4호기(2029년)까지 잇따라 가동이 중지되면 이 지역의 경제와 일자리는 어떻게 될까.

대학가의 위기감은 더하다. 교수들은 학문의 맥(脈)이 끊길까 걱정하고, 전국 원자력 관련 학부생과 대학원생 4500여 명은 어두운 앞날을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얼마 전 전국원자력대학생연합은 "전문가의 조언을 무시하는 태도가 민주적인지 의문이 든다”며 "국가 지도자의 정책 결정 한 번으로 꿈을 잃을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했다. 김찬형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우수한 학생을 확보하지 못하면 원자력 산업계와 연구계에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게 된다”고 했다.

원전은 보수·진보의 이념적 이분법으로 나눌 사안이 아니다. 원전 찬성이 보수일 수 없고, 원전 폐기가 진보의 상징이 될 수 없다. 과도한 핵 공포에 기반할 것이 아니라 중립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할 일이다. 5년가량 수명이 남은 월성 1호기에 당장 사망진단을 내려야 할 안전성 위험이 뚜렷하지 않다. 특히 정권에 따라 번복되는 일관성 없는 정책은 국민의 불신과 혼란을 초래한다. 그 시험대가 월성 1호기다. 전체 원전 용량의 2.9%를 차지하는 ‘작은 원전’ 월성 1호기의 기구한 운명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대훈 논설위원

※이 기사의 취재와 작성에는 박지원 인턴기자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