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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37점 만점에 96점 줬더니 만족 어리석은 존재, 그대는 인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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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DEEP INSIDE │ 노벨경제학상 받은 리처드 세일러의 행동경제학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세일러는 인간의 감정·심리에 주목하며 행동경제학 연구에 천착해왔다.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에 대한 성찰은 요즘 실생활에서 활용도를 넓혀가고 있다. [연합뉴스]

올해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리처드 세일러는 인간의 감정·심리에 주목하며 행동경제학 연구에 천착해왔다. 인간의 비합리적 행동에 대한 성찰은 요즘 실생활에서 활용도를 넓혀가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리처드 세일러(Richard H Thaler·72) 미국 시카고대 부스 경영대학원 교수가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국내에서도 출간된 저서 『넛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승자의 저주』의 저자다. 그가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은 인간 심리가 경제적 의사결정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주목한다. 특히 인간의 합리성을 맹신해온 주류경제학의 한계를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세일러 연구의 성과가 갖는 의미를 살펴본다.

주류경제학 오랜 실패 왜 #마땅히 그래야 할 인간 먼저 가정 #실제는 그렇지 않아 예측 빗나가 #애덤 스미스도 알았던 ‘정념’ #희노애락 감정, 합리적 선택 교란 #이성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 #경험서 출발한 행동경제학 #소변기에 파리 그린 화장실처럼 #간단한 조작으로 행동 변화 유도 #팔꿈치로 쿡 찌르는 ‘넛지’ #시장 자유냐 개입이냐 논쟁 속 #국가 정책의 제3의 길 보여줘

전국시대 송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이가 집에서 수십 마리의 원숭이를 길렀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결국 먹이를 줄여야 하나 원숭이들의 반발이 걱정됐다. 어떻게 하나? 그때 묘안이 떠올랐다. 그는 원숭이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이제부터 아침에는 도토리 세 개, 저녁에는 네 개를 주겠다. 어때?” 원숭이들은 저녁보다 아침에 하나 적게 먹으면 배가 고플 거라 아우성을 쳤다. “그래? 그럼 아침에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로 하자. 그러면 아침에 한 개를 더 먹잖아. 어때?” 그러자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이게 원숭이만의 얘기일까? 이번엔 2017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리처드 세일러 교수가 들려주는 얘기다. 어느 해엔가 그가 변별력을 높이려고 기말고사에 어려운 문제를 냈다. 문제가 어렵다 보니 학생들의 평균점수도 100점 만점에 72점대에 불과했다. 어차피 상대평가라 절대 점수는 의미가 없으나 학생들은 점수가 낮은 데에 불만을 표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는 만점을 137점으로 올려보았다고 한다. 그에 따라 평균점수도 96점으로 올랐다. 그러자 불평하는 학생들이 싹 사라졌단다. 경제학과 대학생들의 수준이라고 저공의 원숭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100점 만점에 72점’이나 ‘137점 만점에 96점’이나 별 차이는 없다. 하지만 72점 받고 불평하던 목소리들이 96점을 주자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언뜻 보면 96점이 더 높아 보이지만, 백분율로 환산하면 70%로 외려 72점(72%)보다 더 낮다. 결국 전보다 더 낮은 점수를 받고서 만족해했다는 얘기다. 이런 결과를 받아놓고도 과연 인간이 ‘합리적’ 동물이라 주장할 수 있을까? ‘행동경제학’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그 잘난 호모 사피엔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자부하는 그 똑똑한 인간들이 저공의 원숭이들처럼 멍청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주류경제학의 기본가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 동안 경제학에서는 경제의 주체인 인간을 ‘수학적 정확성으로 자신의 이익을 최적화하는 합리적 존재’로 가정해 왔다. 세일러는 그런 인간을 ‘이콘’(econ)이라 부른다. ‘경제적 인간’을 뜻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를 줄인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인간’(human)은 아무런 열정 없이 최적의 선택만을 추구하는 냉혈한이 아니다. 그들은 종종 이콘이 보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비합리적 선택들을 하기도 한다. 현실의 경제를 움직이는 것은 이콘이라는 가상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 어리석은 ‘인간’들이다.

예를 들어 600명의 환자가 있어 치료법을 고르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요법 A는 600명 중 200명을 확실히 살릴 수 있다.” “요법 B를 쓰면 600명 중 400명은 확실히 죽는다.” 이 경우 당신이라면 어떤 요법을 택하겠는가? 아마 대부분 A를 택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A와 B는 같은 요법이다. 600명 중 200명이 사는 거나 600명 중 400명이 죽는 거나, 같은 얘기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을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요법의 채택률은 크게 달라진다.

‘이콘’의 눈에는 이 모든 게 그저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어리석음이 ‘인간’의 특성이다.

가상의 ‘에콘’과 현실의 ‘인간’ 사이의 간극은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1723~1790)도 의식하고 있었다. 그가 느닷없이 『정념론』을 쓴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데카르트(1596~1650)를 비롯해 거의 모든 합리주의 철학자들이 정념에 관한 연구를 남겼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인간의 합리적 선택에 교란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념의 기제를 이성적으로 인식함으로써 정념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나중에 경험주의 철학자들이 밝혀낸 것처럼 정념은 이성으로 정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은 애초에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제 한 예측이 오늘 틀렸다는 것을 내일 확인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라는 농담이 있다. 경제학의 예측이 자주 빗나가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예측이 ‘인간이 늘 합리적 선택을 할 것’이라는 부당한 가정 위에 서 있다는 데에 있다. 자신의 예측이 빗나가면 경제학자들은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지라도 속으로는) ‘인간들이 충분히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고 불평하며, ‘경제학의 예측력을 제고하려면 먼저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계몽부터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게다. 하지만 경제학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지 인간이 경제학을 위해 존재할 수는 없잖은가.

‘실제로 그러한 인간’과 ‘마땅히 그래야 할 인간’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기존의 경제학은 ‘마땅히 그래야 할 인간’을 연역적으로 전제했다. 반면 세일러의 행동경제학은 ‘실제로 그러한 인간’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서 출발한다. 물론 이 두 이론이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선택은 대부분 합리적이나, 그의 선택이 늘 합리적인 것은 아니기에, 기존의 경제학을 보완해 줄 별도의 이론이 필요한 것이다. 세일러가 노벨상을 받음으로써 오랫동안 괴짜 취급을 받던 그 별도의 이론이 진지한 학문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넛지 표지

넛지 표지

넛지
리처드 탈러·
캐스 선스타인 지음
안진환 옮김, 리더스북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표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표지

똑똑한 사람들의 멍청한 선택
리처드 탈러 지음
박세연 옮김, 리더스북

승자의 저주 표지

승자의 저주 표지

승자의 저주
리처드 H 세일러 지음
최정규·하승아 옮김
이음

이 새로운 경제학의 통찰은 실생활에 매우 요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매달 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2주에 한 번 지급하는 게 좋을까? ‘이콘’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게다. 어떻게 받든 총액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사를 해 보니 두 방안의 효과에는 꽤 큰 차이가 존재했다. 즉, 한 달에 한 번 받는 노동자보다 2주에 한 번 받는 노동자들이 더 많은 돈을 저축한 것이다. 왜? 임금을 2주에 한 번 지급받을 경우 1년에 두 번은 한 달에 세 번 봉급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 보너스 아닌 보너스가 대부분 저축으로 간 것이다.

결국 별도로 돈을 안 들이고도 초기조건의 간단한 설정만으로 노동자의 저축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이런 것을 세일러는 ‘넛지’(nudge)라 부른다. 즉 ‘팔꿈치로 쿡 찌르는’ 간단한 조작만으로 인간들의 선택을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운전면허증을 발급할 때 간단한 질문을 첨가함으로써 장기기증 비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연금보험이나 의료보험의 경우에도 초기에 디폴트 값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효과는 상당히 달라진다. 이렇게 시장의 계획이나 국가의 정책에 ‘넛지’를 이용하는 것을 탈러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liberatarian patelernalism)라 부른다.

우리나라 화장실에 종종 붙어 있는 표어가 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오줌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화장실의 상태는 대개 이 ‘금지’의 무용성을 웅변한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에서는 이 문제를 남성의 소변기의 한 가운데에 파리 한 마리를 그려넣는 것으로 해결했다. 이 간단한 조치로 밖으로 튀는 오줌을 80% 줄일 수 있었다. 넛지는 자유주의적이다. 오줌으로 파리를 조준하던 그 누구도 제 행동이 제한을 받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면서도 넛지는 개입주의적이다. 인위적 개입을 통해 인간들의 행동을 특정한 방향으로 돌려 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는 형용모순이다. 그 때문일까? 미국에서 ‘넛지’의 저자 탈러와 캐스 선스타인은 종종 개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스스로 조절되는 전능하신 시장에 감히 인위적으로 개입하려 들기 때문이다. 반면 유럽에서 그들은 거꾸로 ‘보수주의자’라는 비난을 듣는다. 왜? 아마도 그 개입을 위해 별도의 비용을 안 들이려 하기 때문이리라. 넛지란 결국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는 대신에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는 것이다. 그것으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한다 하더라도, 그때 인간은 사실상 저공의 원숭이 취급 당하는 게 아닌가.

평가야 어떻든 세일러와 선스타인의 연구가 매우 다양한 영역에 적용되어 실제로 정책적 효과를 낼 수 있는 매우 실용적 이론이라는 데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어쩌면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야말로 우파 자유주의와 좌파 개입주의 사이의 소모적 논쟁에 지친 우리에게 제시된 ‘제3의 길’인지도 모른다.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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