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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예찬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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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1호 29면

공감共感

오동일엽(梧桐一葉). 바람 한 줄기, 잎을 날려 세상의 가을을 알린다.
밤 산책이 아주 즐거울 때다. 한밤에 책을 읽다가 홀연히 일어나 점퍼를 걸치고 무작정 길을 나선다. 집 앞 시냇가를 따라 놓은 길을 천천히 내려간다.

사상가 아닌 산책자는 있어도 #산책자 아닌 사상가는 없어 #뭐가 뭔지 모를 땐 일단 뛰고 #생각을 새롭게 하려면 걸어야

달리는 일은 육체에서 생각을 몰아낸다. 육체를 오직 달리는 행위 자체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초조와 번민으로 마음의 끝단이 타오를 때는 달리는 게 최고다. 자아를 잊고 몰입할 때마다 인간은 새로 태어날 수 있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마라톤 선수들이 자주 경험하듯, 생각이 사라질 때까지 달리면 뇌 속에 엔도르핀이 공급되면서 황홀경에 빠져들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걷기는 달리기와 다르다. 걷는 일은 생각을 위한 것이다. 조각조각 흩어진 생각들을 불러들여 이리저리 배치하고 섬세하게 조직하는 것에 가깝다. 『걷기의 인문학』에서 레베카 솔닛이 말한다. “생각이란 생각하는 사람 앞에 펼쳐지는 풍경이다. 생각의 내용은 그 풍경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생각은 본래 산책의 형식을 띠고 있다. 사상가가 아닌 산책자는 있을지 몰라도, 산책자가 아닌 사상가는 있을 수 없다. 보들레르가 파리의 화려한 파사주와 우울한 뒷골목을 헤매고 다닌 것은 이 때문이다.

감각과 경험을 산책하기 좋은 형식으로 저장하고 있을 때, 인간은 손쉽게 그 일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솔닛은 말한다. “저장된 정보를 기억해 내는 방법은 박물관을 찾은 사람처럼 둘러보면서 걷는 것이다. 같은 길을 다시 걸어가는 것은 같은 생각을 다시 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걷는 일은 흔히 회상(Erinnerung)의 형태로 나타난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헤매던 프루스트가 홍차 한 잔과 마들렌 한 조각에 촉발되어 죽을 때까지 기나긴 기억의 실타래를 펼쳐갔듯, 산책자는 걸으면서 마주친 크고 작은 사물들로부터 실마리를 얻어 생각의 레고를 한없이 조립해 간다. 어디가 목적지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떠오르는 기억들을 재료 삼아 무작정 현재를 다시 써 나간다.

회상은 옛일을 반추하는 게 아니다. 산책자는 한순간도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다. 걸으면서 그는 내면을 생성해 나간다. 회상을 뜻하는 독일어 ‘Erinnerung’에서 접두사 Er-은 능동이다. 산책자는 눈부신 빛을 자기 내부에 던짐으로써 망각의 심연에 던져지려는 순간이 현재로 회귀하도록 만든다. 보들레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산책자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며 우연적인 것을 재료 삼아 영구적이고 영원하며 변함없는 것을 발명하는 마술사와도 같다. 산책은 저절로 인간을 창조자로 만든다.

단테도 산책자의 운명을 타고났다. 보라. 『신곡』은 인생이 길이라는 선언에서 시작한다. “인생길 반 고비에, 나는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었네.” 피렌체에서 쫓겨나 온 세상을 떠돌 때였다. 굴을 잃은 토끼에게 숲속은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길 잃은 영혼은 무작정 달릴 수밖에 없다.

과연 단테는 공포에 질려 스스로에게 쫓긴다. 정신없이 한참을 달린 후에야 그는 인간의 진짜 문제는 세속의 성공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임을 깨닫는다. 문제를 알았으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 순간 마주친 것이 바로 베르길리우스.

베르길리우스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단테는 걸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일단 걷기 시작하자, 그는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하는” 지옥조차 전혀 두렵지 않다. 단테는 시인으로서 지옥을 산책하면서, 언어가 인간의 참혹한 죄악을, 지옥의 끔찍한 풍경을 기록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는다.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때에는 일단 뛰어야 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서 번민을 일시정지시킴으로써 심신을 정비하여 영감이 다가올 때를 기다리는 게 좋다. 하지만 문제가 일단 분명해진 후 해결책을 마련할 때에는 걷는 쪽이 낫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야기한다. “문제를 해결하는 힘은 새로운 정보를 얻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알던 것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온다.” 아아, 이야말로 산책의 능력이 아니었던가. 오가다 마주친 것들을 빌미 삼아 시간의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을 불러내어 생각을 새롭게 마련해 가는 것 말이다. 그것이 체계를 갖추면 철학이 되고, 수식을 이루면 과학이 되고, 이야기를 이루면 예술이 된다.

걷기에 참 좋은 시절이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 시름으로 잠 못 드는 이들이여, 골방의 번뇌를 떨치고, 루소를 좇아 ‘다리와 함께 움직이는 생각’을 즐기는 건 어떤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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